[진보정치가 만난 사람]"마산정신 되살린다"

주대환 8.8재선거에 나가는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

홍기표/현장기자 hongjaru@hanmail.net
주대환 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은 요새 좀 바쁘다. 이번 8.8 재선거에 마산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주대환 후보는 후보가 되면서 어떤 사진사가 권하는 색깔의 양복을 새로 하나 사 입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이렇게 비싼 옷은 살다가 처음 입어 봤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묻는다. “얼만데예?” “한 몇십만원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옆에서 후보 수행을 맡고 있던 당원도 한마디 거든다. “저도 위원장님 덕에 지금 출세했습니다. 태어나서 하루 이틀 넥타이 매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1주일 이상 오랫동안 넥타이 매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예.”

주대환은 54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주대환의 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부농이었고 따라서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다. 커서는 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지만 어릴 적 주대환은 동무들에게 미안하게도 골덴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국민학교 입학식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주대환은 마산 시내로 전학을 오면서 처음 도시학교에서 느끼는 빈부격차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불평등에 대한 반감’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산중학 시절엔 부처님 전기를 잘못 읽고 인생의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인류를 구제한다’는 허황된 목표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돝섬문학회>를 따라다니면서 예수와 윤동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부처와 공자의 그럴듯한 얘기에 현혹되며 퇴폐주의부터 낭만주의, 실존주의, 사해 동포주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의란 주의는 다 한번씩 빠져서 허우적거려 보게 된다.

그러던 소년 주대환은 다시 교과서로 돌아와 이번에는 다시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데카르트와 뉴튼의 신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서 1973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교에는 그가 기대했던 학문은 없었다. 그나마 한국사회연구회 선배들과 함께한 세미나가 진리를 추구하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민청학련사건과 군대 생활을 거쳐 학교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그는 학생운동의 선배가 되어있었다.

1979년 10월 18일 그는 마산에서 부마항쟁을 겪는다. 그리고 1986년 초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비밀스런 노동운동의 정치조직생활을 시작하니 그것이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다.

당시 주대환은 인민노련에서 ‘김철순’이라는 가명으로 정책실장 역할을 한다. 철순이라는 가명은 어느 여성노동자를 애도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세창물산이라는 회사에서 노조 사무장을 지내던 스물네살의 송철순씨가 파업중에 플랭카드를 걸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다가 그만 추락해서 사망한 것이다.

지금도 이 철순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만들었던 인민노련의 기관지 <노동자의 길>, <사회주의자> 등에 남아있다. 그리고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사회주의자의 실천> 등에 엮은이의 이름으로도 남아있다.

인민노련 시절의 '김철순'

그의 활동이 정점을 이룬 것은 91년. 이러한 집필활동을 매개로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비밀 조직들을 통합해 ‘한국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을 때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운동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있으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경험이 풍부한 활동가가 전국적으로 5백명을 넘을 정도”로 이 조직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 비밀 조직은 주대환의 ‘신노선’을 채택함으로써 공개적인 노동자 정당 결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당시에는 대단한 파문이었다.
그는 87년부터 91년까지의 비밀 조직 생활을 회상하며 “행복했었다”라고 말한다.

“가장 훌륭한 인격들, 가장 순결한 영혼들, 까뮈가 말한 ‘천상의 사람들’, 혁명가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들. 서로 얼굴만 보아도 기뻤던 훌륭한 동지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후로 그의 삶은 많은 좌절을 겪었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을 거쳐 민중당 건설에 참여했으나 곧 민중당은 해체되고 건강마저 잃어 일년에 열달은 기침에 시달렸다. 1994년 가을 그는 다시 마산으로 내려가 산을 오르고 능선을 달려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도 주대환 위원장의 마라톤 실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편이다. 마라톤 완주는 못해봤지만 절반코스를 1시간50분에 들어온다. 그렇게 건강은 많이 회복했지만 마산에서 시작한 진보정당운동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만 두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진보정당의 지구당 사무실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때로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그만둡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몰려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국회의원 출마라는 보통 사람들은 잘 상상하지 못하는 모험과 투기적 사업을 벌입니다. 이 나라의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저는 미친놈입니다. 돈키호테입니다.”

요즘 주대환 선대본의 분위기는 매우 좋은 편이다. 김현철이 출마를 위해 뛰다가 출마를 포기한 뒤로 한나라당이 심각한 공천 파동을 겪고 있고 지역 여론이 주대환 선대본의 중심구호인 ‘마산정신을 되살리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지난 지방선거의 성과인지 언론에서도 확실히 3당 취급을 해주고 있다. 지방 방송은 인터뷰를 하면서 세번째로 주대환 위원장의 모습과 주장을 몇 십초 동안 비춰주었다.

사람들은 왠지 ‘주대환’하면 전에 후보로 선거에 몇 번 나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오해를 한다. 그러나 실은 이번이 첫 번째 출마다. 한국노동당 이래로 10년이 넘게 진보정당운동을 해왔지만 이번이 주대환 위원장에겐 처녀 출전이다.

자신이 선거를 기획하고 지휘해 본 적은 여러번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후보가 되기는 처음인 것이다. 그래도 주대환 위원장은 초보 후보답지 않게 후보로서의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다. 숙제검사 받는 초등학생처럼 하루에 만날 사람과 뿌려야할 명함 목표치를 그날 그날 선거본부장에게 보고하고 검사 받는 걸 잊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대환 위원장이 전부터 글은 잘 썼지만 대중연설에 약하다고 평했고 선본 관계자들도 이를 조금씩 걱정하는 눈치였으나 짧았던 첫 방송 인터뷰와 출판 기념식에서의 연설을 보면서 다들 ‘잘하고 있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중이다.

비판적 지지를 넘어서

주대환 위원장은 최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마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3.15의거탑 앞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3.15의거탑은 주대환 선대본 사무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3.15의거와 부마항쟁으로 상징되는 마산의 정신을 선거 모토로 잡은 선거 기획의 일환인 셈이다.

진보정당이 비판적 지지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마산에서 주대환 위원장이 넘어야 할 보수정치의 산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이 지역은 한나라당의 정당 지지율 75%를 기록할 정도로 한나라당의 텃밭이다. 물론 마산의 당원들은 이렇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과 상황 그리고 불가능한 지역에서 한번 큰 승리를 일궈보는 것이 진정한 쾌거라고 말하며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채 의지를 불태우는 중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런 불가능에의 도전은 주대환 위원장의 지나온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마산과 창원이 이 나라의 정치를 현대화하는 역사의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60년 3.15의거와 79년 부마항쟁이 20년 터울로 일어났듯이 이제 20년이 지난 오늘에 또 다른 정치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주의와 부정과 부패가 극단까지 갔기 때문에 대역전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새롭게 주대환에게 던질 한표는 마산 민중들이 했던 그 이전의 수많았던 투표와는 전혀 다른 뜻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주대환 위원장은 이런 말로 다가오는 8.8 재선거의 각오를 밝혔다.
[ 97호] 7.22 ~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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