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책]아리랑고개의 여인

삶의 문제로 인해 정치적으로 좌절하지 않기 위해

김영선(노동자의 힘 정책부장)

사랑은 무엇이고 혁명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나에게 그런 것들을 이해시키려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치적 생활'로 가정을 돌볼 새도 없이 바빴던 나는 아내의 그런 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이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아내의 이야기를 펴내면서 1974년 9월 고준석

{아리랑 고개의 여인}. 이것은 해방전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직후 일본으로 밀항한 후 가족과 고향을 영원히 잃어버린 고준석이 아내 김사임에 대한 회상을 기록한 글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급박한 시대를 살았던 고준석과 김사임. '아리랑 고개의 여인'이란 다소 문학적(?)이면서도 언뜻 들어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만큼이나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은 복잡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해오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시대 이후 변혁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21세기 한국사회 변혁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겪고 있으며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운동가들이 가볍게 혹은 가장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쉽게 털어놓고 토론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아리랑 고개의 여인}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들의 삶과 운동,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시기까지 조선공산당을 둘러싼 다양한 일들을 담고 있지만 유독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내 삶의 가장 근접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당시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사실'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내가 세포회의에서 참석하면 나는 아이를 보아야만 했다, 아내는 세포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세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나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95쪽)
'그러나 아내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집안에서 내가 할 일이 많아졌다. 종종 나는 아침을 지어 아이들에게 먹이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해야만 했다. 해방 직후에 아내가 혁명운동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막연히 느꼈던 불안감이 차츰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104쪽)
'정치적 좌절로 초조해 하고 있던 나는 혁명가가 그 따위 집 걱정이나 하게 되었느냐고 화를 벌컥 내 버렸다. 잘못이 없는 아내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나의 무책임한 행위, 비굴한 근성 등을 열거하며 나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려는 오기로 아내의 비난을 무시하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 서재로 가버렸다.……그 때 나는 정치적으로 좌절한 자는 인간적으로도 비굴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115-116쪽)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준석이 고백한 사실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결혼을 부정적으로 말하곤 한다. 또한 가까이 대하는 동지들로부터 고준석이 겪었던 혹은 김사임이 겪었던 일들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운동을 하고 쉼 없이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체제가 허락하지 않아 생기는 힘든 일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운동을 질곡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역시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이 당장에 힘들 거라면 그 고통의 깊이와 정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결국 한국전쟁 직후 일본으로 떠난 고준석은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이념의 대립이 치열하던 시기에 아내 김사임도 특무대가 자행한 린치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고준석과 김사임이 낳은 5남매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조국이 통일된다면 나는 곧장 서울로 가서 처자의 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서 지난날의 무책임과 비정을 빌고 싶다. 그날을 위해 나는 열심히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며 책을 마감한 지은이 역시 혹시 나와 같은 생각과 고민을 풀어내지 못한 서러움을 표현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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