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복(노동자의 힘 노동위원장)
{몽실언니}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네 언니들의 옛 기억들
권정생의 어린이 소설 '몽실언니'를 보면 눈물과 함께 우리네 언니들의 생활과 아픔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해방된 조국에 빈 몸으로 들어온 만주거지 일본거지들이 들끓고 있던 농촌마을이다. 날품팔이 아버지가 먼 곳으로 돈벌어 온다며 떠나고 소식 없자, 몽실이와 동생 종호를 들쳐업고 걸식하던 몽실엄마 밀양댁은 가난이 지긋지긋하여 1947년 봄 살던 마을에서 야반도주한다. 몽실이가 7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를 버리고 좀더 잘사는 김씨성을 가진 집으로 팔자를 고친 것이다. 정몽실이 김몽실이 된 후 동생 종호는 병으로 죽는다. 이복 동생이 새로 태어난 후 새아버지의 학대와 구타에 밀양댁과 몽실이는 연일 울어야 했다. 이복동생 영득이를 보살피며 끼니나 채우며 종처럼 살던 몽실이는 끝내 새아버지 구타에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다. 죽지 못해 살고 있던 몽실이에게 친아버지가 찾아오고, 그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이번엔 북촌댁을 새어머니로 맞게 된다. 잠깐의 행복이 있었던가, 머슴살러간 아버지가 없는 틈에 새어머니는 동생 낳다 죽고 곧이어 아버지마저 의용군으로 전장에 나간다. 이제 홀로 된 몽실은 끝없는 가난과 전쟁 중에도 또 다른 이복동생 난남이를 젖 구걸하며 키우면서 아버지를 기다린다. 굶주림에 지쳐 친어머니를 찾아가고 전장 갔던 김씨 아버지가 돌아오자 동생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가난과 외로움에 지쳐 좋은 집에 식모 살이 하던 중 전쟁 갔던 정씨 아버지는 다리가 부러진 채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온다. 다시 한가족이 모였으나 몽실이는 또 구걸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와 동생 난남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러던 중 친어머니 밀양댁은 심장병으로 죽는다. 독일 천주교인이 지었다는 자선병원에서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줄서 열여섯날을 기다리던 아버지 마저 죽는다.
그러던 인생 30년 후 40이 넘은 몽실이는 곱추 남편과 결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난하다. 부잣집 양녀로 갔던 동생 난남이는 병을 앓고 있은 지 10년…, 행복은 끝내 없단 말인가.
몽실 모녀가 도시로 나가 차라리 취직을 했다면
몽실 엄마 밀양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이럴 것이다. '춘궁에 못 이겨 도시의 방직회사나 고무공장 등으로 응모되어 가는 청소 남녀의 이향자 가족이 소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젊은 부녀자가 더욱 많아 경북 문경군을 중심으로 상주, 예천 등지에서는 인천 동양방적회사 여공에 응모되어 가는 처녀와 부인들이 지난 15일 오후 6시30분 점촌역 발 열차를 서민수씨 인솔하여 78명이 이향의 애달픈 눈물을 뿌리며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인천방직회사로 떠났다는데 작년 이래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점촌역을 떠나 인천방직으로 넘어간 부녀자만이 560명이란 놀라운 숫자에 달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6.3.19.)
조선방직으로 갔다면 '남녀 2천여 직공 중 여공 천명 기숙사가 있는 큰 공장, 소위 모집쟁이가 지방 농촌을 다녀 5,60명씩 기숙사에 몰아 넣는데 통근여공이 더 자유로움, 가난한 농부 딸, 남편에게서 배척받은 생과부 여공들은 5시30분에 잡역의 등쌀에 일어나 6시 식당, 저녁 6시30분 귀사, 초급은 월급 25전, 1주간마다 야근을 교대로 하였는데 돈은 부모님께 보내고, 겨우 옷을 사 입으면 다행, 일요일에 동무들과 외출하는 게 가장 큰 낙, 회사 안에서 어쩌다 연애를 하게 되면 무조건 해고였고 파업 때도 물론 해고라고 한다.(동아일보 1934.1.2.)
그러나 작업환경과 조건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해서 세게 돌아가는 기계와 날카롭게 감사하는 감독 아래에서, 백도 가까운 연기로 푹푹 찌는 공기를 호흡하면서 또한 어두운 공장에서 뼈와 살이 아프고 살이 부스러질 정도로 노동하는 여공들은 대개 15세 가량의 어여쁜 소녀 내지는 20세 전후의 여자들로서 그 대부분은 농촌 각지에서 모집해 온 사람들이다.… 노동시간은 길고 식사는 형편없어 그들의 영양상태와 건강은 극도로 악화하고 있다. 1년 365일을 태양이 동에서 뜨는지 서에서 뜨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생활하기 때문에 안색은 거의 중병에 걸린 안색이고 몸은 쇠약해져서 쉽사리 내 쫓기기도 한다고 한다. 게다가 공장 내에는 특수한 규율이 있어 어떠한 위반도 용납되지 않는다.'(조선중앙일보 1936.7.2. 방문기 [조선방직 3천여 아가씨를 찾아])
몽실엄마 보다 더 나이가 많았던 엄마들은 1930년대 몇 차례 있었던 조산방직 파업투쟁을 경험했을 것이다. 몽실엄마 보다 늦게 취업했다면 40년대 일제의 착취와 억압을 견뎌내며 30년대 파업투쟁의 영웅담을 기숙사에서 선배 언니로부터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장차 '전평'조직을 건설해 낼 일꾼이 되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7살 몽실이가 52년 12살이 되고 부산으로 피난 와서 나이를 속여 조선방직에 취직했다면 그녀 역시 지겨운 가난과 구걸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은 매 한가지였으리라.
"강일매 취임 후 1년 정도 되었나 아버님 친구 분이었던 이재형(전 국회의장)의 소개로 조선방직에 취업했습니다. 창고관리를 맡았습니다.… 어린 나이를 속이고 들어온 11살 어린 소녀도 많았습니다. 공장 내는 너무 더워 삼베옷이나 내의만 입고 일을 했습니다. 더위와 교대근무로 하루에도 몇 명씩 쓰러졌습니다.… 제가 건의했습니다. 하루에 사탕 5개씩(당시의 왕사탕) 나눠주자고 큰 사탕이라 5개 빨아먹으면 몇 시간은 충분했죠,…"(ㅈㅇㅍ 목사 82세 당시 조선방직 직원, 필자 직접 구술 면접 2002년 6월20일, 평택)
노동자들은 군수광목을 생산하는 '생산전사'로서 2교대 24시간 조업체제를 유지, 매달 생산량을 증대해 갔다. 따라서 근로조건은 당시 타 방직업체에 비하여 좋은 편이고 1일 8시간이외의 노동시간에 대하여는 별도의 시간외 근무수당이 지급되었는데 노동은 전시 생산공장으로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나까오 미찌꼬)
만약 몽실이가 공장생활을 계속 했다면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언니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가난했던 30년은(책대로 하면 대략 1980년 무렵이다.) 6,70년대 저임금 고성장의 우리의 과거사이며 몽실언니들은 30년 후에도 여전히 가난한 그러나 이 땅의 주인인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52년 조선방직 파업투쟁의 허상과 실상
해방되고 나니까 그 공장(일본인공장, 조선방직, 동양방직)은 완전히 종업원의 물건이 된다고 하는 확고 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관리위원회를 종업원들이 구성했어요. 그래서 대표자로서 위원장을 지명하고 일본사람에게 공장을 내놓아라 동시에 그 재고품을 처분하라 현물을 분배해 달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한 3,4주 옥신각신 했는데 조방은 공장이 부산에 있었던 관계로 중앙공기의 반영이 좀 늦었었지요. 그래서 다른 서울 근방에 있는 방직공장보다 늦게 싸우기 시작해서 오래 싸웠지요. 지금 말씀한 관리위원회하고 일인간부하고 한참 싸우다가 결국 미군이 진주를 하여서 그 사람들이 일인과 종업원들과 사이에 조정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 제품처분이라든지 또한 과거의 퇴직금이라든지 이런 것을 받고 동시에 그 운영에 대한 경영자를 결정할 때까지 일을 잘해라 해서 아마 한 달에 2,3일은 일을 했을 꺼예요…그때 종업원은 종업원대로 자기의 공장이라 해서 종업원 3천명이 다 사장 노릇을 했지요.( 김기원, 1947년 조선방직에 대한 회고. [방협창립 10주년 기념지}3부.)
조선방직 제 4대 관리인으로 임명된 정호종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방직기술자이고 해방이전에 이미 방직과정으로 방직기 한 대 한 대를 자신의 손으로 설계, 설치한 분으로 앉아서 공장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있을 정도…사내 종업원들에게 기술면에서 신뢰감을 얻고 있었고, 자치관리위원회의 중심적 존재였다.…퇴직금을 얻어다가 미군정에서 관리인을 결정할 때까지 공장을 보존했다.…후생용 광목의 현물지급이 있었다. 이것은 일정한 생산목표를 초과 달성할 경우 생산량의 5.5%를 실물로 급여… 이는 조방 종업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실익을 가져왔다고 추정된다. 이 후생용 광목의 수령분을 공출해서 노조와 중역진 사이에서 추진되고 있었던 조방공동불하를 위해 노동자분 입찰보증금을 준비하고 있었다… 3억 7천만환까지 준비….(나까오 미찌꼬)
열악한 노동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한국인 중역진과 전 노동자들이 함께 '공장관리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주관리 운동 연장선상에서 공장불하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난 호에 지적했듯 불하직전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불하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조작 간첩단사건에 조방특별 지부위원장 장재봉까지 구속되었었는데 대한노총은 아무런 항의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장재봉 대신 위원장이 된 안종우와 그 밖의 자신들에게 바람직한 관리인 선임을 위해 상공부에 진정활동을 한다. 그 후에 이승만 측근 강일매가 사장으로 취임한다. 강일매는 다시 조방지부를 매수하며 대한노총과 대립한다. 자기 친인척을 포함하여 123명을 일거에 신규채용한 강일매는 이어서 20∼30년씩 된 장기근속 직공 중 60세 이상을 즉각 해고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노동자 대중과 강일매의 대립지점이 구체적으로 형성된다.
강일매의 해고 정책이 대한노총 활동가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대한노총의 쟁의가 시작된다. 대한노총 인천지구연맹 감찰위원장 한승룡이 부산으로 피난와 공장장 권한으로 조방에 근무중인데 그가 해고된다. 당시 감찰위원회란 반공청년단의 핵심으로 전평분쇄 및 타도의 선봉대이며 전평조합원 수색조의 역할을 하는 부서이다. 1952년 1월1일자로 조방쟁의대책위원회 명의로 '투쟁선언'이 발표되었다. 주요요구 1, 2번이 강일매사장 파면요구와 인사문제 원상복귀였다. 여성노동자는 이 파업에 즉각 참여했다. 1월14일 공장내 시위(1천3백명), 21일 국회앞 대중시위(1천명)가 그것이다. 이후 한 달여 동안 공적기관(상공부, 사회부, 국회)의 개입으로 강일매는 입지를 잃고, 조방쟁의대책위나 조방지부가 우세하게 되어 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월5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전진한은 조방조합원의 강력한 지원으로 당선된다.(조합원은 물론 가족까지 동원했으며 경비도 스스로 해결했다. 이상 안종우 '조방쟁의' 노동공론 72.9) 그리고 2월23일 강일매는 사장으로 다시 복귀한다.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동력은 보궐선거로 귀결되고 또 유린 되어버린 것이다.
조방쟁의 대책위는 '조방파업선언'을 발표하고 3월3일 24시간 파업돌입을 선언한다. 그러나 쟁의의 목적이 '임금인상, 후생복지, 해고자복직 등 노동조건투쟁이 아니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조방쟁의가 아니라 대한노총 쟁의가 된 것이다. 강일매와 전진한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3월1일 파업중지가 발표되고 3월11일에야 전진한이 국회본회의장에서 3월12일 파업단행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한 후 13일 오전 7시 파업중지를 선언한다. 파업은 실패하고 강일매는 관리자 26명을 포함 총 600여명의 종업원을 대량 해고한다.(나까오 미찌꼬)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의 실상은 어떠한가
우선 12월30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열린 '조방쟁의 진상보고대회'에 대거 참석한다. 지도부의투쟁결의와 무엇보다도 요구조건의 공식화를 확인한다.(특히 인사문제 원상복귀) 그후 즉각 1월초부터 '폭군 강일매 물러가라' 플랭카드를 공장 굴뚝에 내걸고 벽보투쟁을 전개한다. 1월12일 경찰은 생산량 복구, 작업시간 중 집회금지, 작업시간 외 종업원 잔류금지, 외인출입금지 등 특별지시를 하나 오히려 1월14일 일제히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위를 감행한다.(3천여명) 이후 21일 오전 9시30분 약 1천5백명이 국회에서 시위를 벌이고(야간작업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반으로 짝 갈라서 밥 안먹고 국회로 감), 동시에 약 4천여명은 공장 안에서 시위한다. 당시 한복과 고무신을 신었던 노동자들은 국회앞 시위의 와중에 몇 번씩 몰려다니며 수백 켤레 고무신이 거리에 널브러졌다. 공장 내에서 시위하던 노동자들은 사장실 유리창이고 뭐고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이 투쟁 후 간부들이 구속되자 검은 리본을 달고 점심시간에 계속 시위를 했으며 강사장의 공장출입을 저지했다. 물론 전진한 출마 보궐선거 시에도 매일같이 2천 여명씩 동원하여 선거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3월11일 전진한의 파업선언시 노조간부는 전혀 없었다. 구속되었고 폭력배들이 별동대를 조직해 공장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파업지령 역시 비밀리에 쪽지로 전달되었다.(이상옥, 조선방직쟁의, 1988)
3월12일 오전 8시 계엄령 하에서도 6천여 조합원은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여 공장 밖으로 진출했다.…경찰과 맞붙었다. 경찰과 깡패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가면서도 종업원의 손에 떠밀린 철문이 넘어졌고 '바리케이트'로 친 트럭 10대도 밀려났다. 종업원중 1/3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40여명이 구속되었다.(안종우)
파업이 3월12일에 끝났지만 공장은 여성노동자들의 손에 있었다. 경찰이 공장에 800여명이나 배치되었다. 시위는 못했지만 경찰도 작업장안으로 들어오진 못했다. 한 이틀을 막아냈다. 계속해서 경찰들이 파상 공세를 해오니 나중엔 어쩔 수 없었다. 그 후에도 경찰들이 사무실이며 운동장에서 계속 감시했다. 공장은 강일매 천국이 되었다. 강일매가 연예계회장이어서 강당에 모아놓고 매주 유명한 가수들을 불러다가 공연하고 그랬다. 여성노동자들은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전부 파업에 참여했다. 서로 휘파람 같은 것으로 소리를 내어 신호로 행동을 통일했다. 한동안 작업장에는 자기네 편 관리인이나 들어갈 수 있었다.(앞의 ㅈㅇㅁ 목사 구술)
그렇다면 특별한 지도부도 없었던 여성노동자들이 대한노총의 파업중지 선언에도 이렇게 독자적 투쟁을 할 수 있었던 역량은 어디서 기인 한 것일까. 그 전통은 어떻게 축적되었단 말인가. 이 의문을 해명하려면 우리는 몽실엄마 세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