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피해대중은 뭉치자" 호소했던 진보당 대선후보

죽산 조봉암선생 43주기를 맞으며

정태영/정치학 박사ㆍ<조봉암과 진보당> 저자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 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 신경림(<와> 92년 여름호)


서울법대시절 진보적 학생서클이었던 신조회를 이끌던 남재희형은 평소 죽산 조봉암 선생을 무척 따랐다. 죽산선생 기념사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고 꼭 참석하곤 했다. 그러던 형이 며칠 전 시 한수를 ‘발굴’하여 나에게 전해주었다. 신경림(申庚林) 시인이 <시와 시학>이라는 계간지에 투고한 죽산 선생을 뼈아프게 기리는 글이었다.

1945년 해방으로부터 1950년대 한국은 실로 암담했다. 해방 전에 일제와 맞싸웠던 순수 민족진영과 좌파 민족진영을 한꺼번에 묶어 매장하고 남한에 단독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미점령군의 집요한 책동은 무력을 배경으로 여운형·김규식 선생의 민족자주연맹계와 대한 민국의 임시정부 수반 김구 선생의 한독당계를 정계 일선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좌우의 격돌은 필연적으로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 노선이 그렇게도 우려하며 회피하려던 남북의 전면적 충돌, 그것은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UN을 통한 통한회담은 그 끝마무리를 지었다.

민생은 문자그대로 도탄에 빠졌다. 해방직후에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달아난 소규모적인 인쇄, 방적, 기계, 조선, 화공 등의 공장은 해체되고 파괴되어 산업생산시설이라고는 보잘 것이 없었다. 소수의 공장노동자 이외에 품팔이, 일터 찾는 떠돌이들이 온 도시를 메웠다. 농업의 기초조차 파괴되어 농촌이 피폐할대로 피폐한 끝에 이농꾼이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 시절 마구잡이로 양민을 죽인 ‘거창사건’, 징집된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식량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 등이 상징하듯 부정부패가 난무하고 빨갱이라고 불리기만 하면 그 진실 여부가 제대로 가려지기 전에 죽게 되는 세상, 인권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고 군과 관의 고관들은 닥치는 대로 횡령과 착복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정부와 군경에 대한 증오는 온 세상을 메웠다. 이승만과 극소수 권력집단을 제외하고는 “국민모두가 권력의 피해자”였다.

6.25전쟁의 와중에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미군과 이승만이 밀월관계에 있었던 시절, 온 강산이 포성으로 가득하고 온 하늘이 포연으로 가리워진 그 시절, 그때의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과 겨룬다면 그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자의 행위나 다를바 없었다.

그런데 죽산 조봉암 선생은 감연히 일어나 무능 부패 독선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이승만에 맞섰다. “피해대중은 뭉치자”라는 선거구호는 단연 압권이었다. 더 이상 어떤 구호도 이 구호만큼 감동적이고 선동적인 것은 없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죽산선생의 뜻은 비장한 것이었다. 목숨을 내던지는 용기가 아니고서는 감히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3대 대통령 선거는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선거였다. 공포와 폭력 속에 치뤄진 선거에 패한 죽산 선생은 대통령 선거로 진보당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기회를 이용하여 차기에 대비한 지구당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집요한 진보당의 조직활동에 대한 이승만의 대응은 무자비했다. 경찰이 백주에 진보당 결당현장을 습격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협박, 공갈, 폭행 등 각가지 수단을 다해 진보당 활동을 방해했으나 조직은 확대되어 나갔다.

이 가공스러운 집요성 앞에 이승만 정권은 세칭 ‘진보당사건’을 조작, 당위원장인 죽산 조봉암선생을 중심으로한 핵심간부를 모조리 연계시켜 투옥했다.

1958년 1월13일 그로부터 1년6개월 후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진보당 사건은 간부 대다수가 무죄선고되고 교묘한 공작 끝에 진보당 사건은 “양명산”을 끌어넣은 간첩사건으로 개장되어 죽산 조봉암선생에게 사형이 언도되어 같은 해 1959년 7월 31일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앞뒤가 깜깜하던 시절, 불의에 항거하던 죽산선생은 처참하게 법살되었다.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최후 진술에서 죽산 선생은 “서로 겨루던 두 사람 중 패자는 승자에게 흔히 죽임을 당했다. 내가 죄 없이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내가 죽은 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열매맺기를 바랄 뿐이다….”

죽산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지 43년째가 되는 이해, 7월 31일 기일을 앞두고 신경림 시인의 시를 입수해 읽고 나니 감회가 새로워 암울했던 그날 그 시절을 되새겨 본다.
[ 98호] 7.29 ~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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