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어떻게 개인만의 책임입니까?

장애인학습권 침해 소송 이긴 박지주 씨(31세,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제 성격이 쾌활하고 적극적인 편이예요. 그래도 매일 3, 40명도 넘는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몰랐다. 다리나 팔을 못 움직이면 얼마나 불편할까 상상한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기분이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열등한 사람처럼, 무용지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1급 장애인 박지주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결핵성 척수염을 앓아 하반신이 마비된 이후 줄곧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왔다. 중학교 2학년 때 몸이 아파 휴학한 뒤 복학하려고 했지만 학교 측이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자퇴를 종용해 그만둬야 했다. 어렵게 다시 공부를 시작해 스물 여덟 나이에 입학한 숭실대는 그러나 그에게 또다른 장애였다.
“하숙집에서 나가려면 계단을 대 여섯 개 올라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은 10초면 될 일이 나는 30분도 넘게 걸리는 거예요. 휠체어까지 가지고 올라가야 되니까. 매일 동생한테 부탁하고 동생이 없으면 하숙집 아줌마한테 전화를 걸어요. 그것도 안 되면 대문 밖에 누구 지가는 사람 없나 살펴보고 부르는 거예요. 학교에 가면 강의실 한 번 옮길 때마다 또 ‘도와달라’고 해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업어 달라, 휠체어 들어 달라. 식당이 2층에 있었을 때는 밥 먹으러 못 갔어요. 대충 굶거나 김밥 먹고.”

애초에 지주 씨도 숭실대를 상대로 ‘장애인 교육권 침해’ 소송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느 날 강의실로 이동하던 중 계단 앞에서 한 학생에게 계단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도움을 부탁했던 게 계기였다.
“휠체어도 저도 무게가 많이 나가요. 그러니까 그 학생도 힘들었을 거예요. ‘노동력 착취’라는 말을 쓰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아니다, 당신이 몸을 움직이는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니까 그걸 나와 함께 나눠 쓴 거다’하고 말했죠.”
도움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빈 강의실에 혼자 남겨져 어쩔 줄 몰라하며 그는 절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타인에게 부탁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구조가 문제였다. 그 자신의 장애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장애인을 입학시킨 대학은 그가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그는 지난 3월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전 승소판결을 받았다.
“제 전공이 ‘사회사업’입니다. 소송을 걸겠다고 하니까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사회복지를 공부하셨다는 과 교수님이 ‘보상금 얼마 받겠다고 학교 명예를 훼손하는 거냐’고 하셨어요. 또 어떤 분은 ‘엄마 등에 업혀서 학교 다니면서도 성공한 장애인 얼마든지 있다’ 그러세요. 그게 ‘사회사업’의 수준입니다. 저는 이런 게 너무 싫어요. 개인의 의지로 돌리는 거, 장애인을 동정이나 시혜의 차원에서 ‘돕는’ 거. 제가 바라는 건 평등한 인간관계예요.”

기존과는 다른 장애인 인권운동을 해보겠다고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학교인가. 제대로 된 과일 한 번 먹어보지 못할 만큼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나 뒤늦게 대학에 다니겠다고 했을 때 막노동 일을 하시는 지주 씨의 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말리셨다.
“지금은 ‘장애’가 나를 옥죄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가난’이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내 장애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MRI 찍는 돈이 얼만 줄이나 아느냐고 말리세요. 일주일 동안 단식 농성한 끝에 병원에서 엄마한테 등짝 맞아가면서 검사를 받았어요. 그나마 다행인 게 우리집이 잘 살았으면 제가 지금처럼 씩씩하게 못 자랐을 지도 몰라요. 엄마가 저를 ‘배려’한 게 아니라 다른 애들처럼 똑같이 대하셨거든요. 방 청소 안 하면 야단치고, 설거지 해라 닥달하고. 아빠는 아예 저한테 우리집 경제권을 맡기셨어요. 돈 못 벌고 다른 일은 못 하지만 월급봉투라도 관리해야 한다구요.”

그래도 외롭고 괴로운 게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10대 시절에는 두 번이나 죽으려고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죽는다고 해서 정신 없이 마셨다가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고, 죽으려고 잔뜩 집어삼킨 알약이 영양제였던 탓에 살아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몸이 아프다는 것보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피하기만 했던 사람이 그리워서 사회로 나왔지만 여성 장애인이라는 처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편견과 사회적 차별은 그를 점점 더 ‘전투적’으로 만든다. 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 특히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램이다.

“이렇게 살아서 보고 느끼고 움직이는 제 자신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나를, 우리를 무용지물로, 천덕꾸러기로, 진짜 장애인으로 만드는 사회가 너무 화가 나요. 장애는 그 개인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예요. 교통사고나 병원균이나 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니까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장애인을 돕는 건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연대’이고,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무’라고 나는 생각하는 거예요. 나 역시 나와 같은,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회적 책임을 느끼니까요.”

장성희
태그

장애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참세상뉴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