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베이징통신원 strugil15@hanmail.net
“중국이 노(NO)라고 말하는 것은 대항이 아닌 평등한 대화를 위해서이다.”
1996년 중국뿐만 아니라 서방세계를 크게 놀라게 했던 책,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의 표지말이다.
출간 후 당시 서방언론으로부터 지난 20년간 서방에 가장 영향력을 준 책 중의 하나로 대서 특필됐을 만큼 중국내외에 많은 논쟁을 몰고 왔었던 책이다. 이들이 내건 ‘평등한 대화’의 수단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민족주의’였기 때문이다.
1995년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 주최로, ‘중국청년들이 보는 세계’라는 주제의 방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노(NO)’의 기초자료가 됐다. 발표된 결과에 의하면, 당시 중국청년들은 미국을 가장 비우호적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가장 호감이 안가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샤오똥(王小東)을 비롯한 이 책의 주요 공저자들은 이 결과를 토대로 일부 중국인들에게 물든 사대주의적 사고방식 등을 거칠게 비판하는 한편, 향후 적극적인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을 통해 서방국가들의 반중국 정책을 고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이른바 냉전해체 이후 중국 내 ‘신민족주의’의 부활을 촉구하는 예고편이었다.
‘NO’의 등장 이후, 중국 내 민족주의 담론은 문화민족주의론 및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등과 같은 관련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핵심 화두가 됐다.
중국 지식인사회에서 민족주의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은 왕샤오똥은 그후 1999년에 송치앙 등과 공저한 또 다른 문제작 <세계화 그림자 하의 중국의 길>(全球化陰影下的中國之路)이라는 책을 펴내 다시 한번 민족주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은 21세기의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미국 주도의 21세기 패권질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 국방실력을 강화해야만 하고 그 중에서도 경제적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이 책의 출간은 이른바 ‘1999년 왕샤오똥 사건’으로 불리면서 중국 고위층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정책적인’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사회에 민족주의 담론이 유행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하나는 89년 천안문 사건이후 팽배해진 사회불안 심리와 안정에 대한 희구가 높아지면서 관주도의 새로운 사회통합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이 대두됐다는 점이다.
둘째는, 개혁개방 이후 시장화 개혁이 가속화되면서 ‘돈을 보고 걸어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적 통치의 합법성을 뒷받침할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가 요구됐던 시점이었다.
즉 권위의 합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물론 이러한 국내적 요인 외에도 당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중국위협론 및 억제론 그리고 99년 미국에 의한 주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 오폭사건 등의 이른바 ‘외부효과’ 역시 중국 내 지식인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했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담론의 대두는 이러한 ‘외부효과’에 의한 영향보다는 내부적인 ‘수용의 필요성’이 더 절박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사회에 팽배해 있던 분위기는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정신적·사상적 공백과 함께 중국사회주의 내부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었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반성적인 사유는 중국사회의 제모순과 문제점들의 원인을 자체내(중국) 문명이 가지고 있는 낙후한 결과로 결론을 내리고, 그 대안을 서구사회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른바 ‘서학’(西學)열풍이 중국을 휩쓸던 시대였다. 게다가 89년 천안문 사태까지 일어나면서 중국은 걷잡을 수 없는 ‘신앙의 위기’에 빠지게 되고, 개혁개방 이후 최대의 체제불안정기를 경험하게 됐다.
이러한 위기에서 중국사회를 ‘구출’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였다. 즉 명목상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킬 수 있으면서도 ‘발전지상주의’라는 개혁개방 시대의 새로운 체제이데올로기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구호로서 민족주의만한 적임자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중국을 둘러싼 서방세계의 위협론이 대두되면서, 정치·경제·국제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민족주의는 중국의 국가 이익과 발전전략의 기본 인식틀로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정치적 민족주의’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 100호] 8.19 ~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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