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해체'와 '분열'을 넘어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화를 위한 조직적과제를 부여잡자

의회전술이든, 전선이든, 평의회든 간에 그것들 어느 하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 전체를 특정 정세에서 일관되게 모아 세우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진해 갈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영균(노동자의 힘 정책위원)

'위기'와 '해체'의 시대를 넘어

정태춘은 90년대를 '환멸의 시대'라고 했다. 91년, 보수파의 반란과 잇따른 쿠데타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됨으로써 우리에게 '위기'는 실물화된 현실로 다가왔다. 말로만 떠돌던 '위기'는 구체적인 운동의 전선 안에서 이탈과 전향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면서 '현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기억의 저편으로 과거를 묻는 '망각'이 시작되었고 '위기'는 본격적인 '해체'의 시대를 작동시켰다. 그 선두에 가장 영민한 계급적 후각을 자랑하는 지식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엄혹한 파시즘적인 정세가 강제했던 80년대에는 혁명적 지식인으로 자신을 드러내었지만, '위기'가 실물로 다가온 90년대에는 발빠르게 항로를 수정하여 탈계급적 포스트 담론의 전도사가 되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멀어져 갔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성과 투철한 개인적 욕망에 대한 절제와 배제라는 80년대의 명백한 대립적 '전쟁 상황'으로부터 개개인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욕망'은 '또 다른 억압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선동으로 반작용의 운동을 가속화시켰다. 마르크스주의는 해체되어야 했다! 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해체'는 지적 담론의 장 안에서 '정치에 대한 망각'과 실종을 낳았을 뿐이다. 대신에 명백한 계급적 대립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계급으로 단결시키고 '전장'에서 부르주아에 대립해 서 있지 못하는 현실을 이데올로기적 장 안에서 불러내기 시작했다. '욕망'과 '무의식',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내적 훈육의 체계로 수용하는 피지배 계급의 주체 형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수입되었다. 그리고 사회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 차이를 가진 존재들, 개인의 다기한 욕망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노동자 계급 자신의 내적 정치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역사를 내적으로 성찰해 내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운동이 아니라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난 '망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 명백하게는 억압되어 왔던 개인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은밀한 개별화의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스탈린 개인의 오류와 음모로 치부되었고 더 나아가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이 낳은 이론적 불명료화 또는 공백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누구도 이 상황을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앙'처럼 신봉했던 그들 스스로의 역사, 즉 그 자신이 만들어 왔던 그 역사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자신이 그 역사와 전혀 다른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과거를 단칼에 날려 버렸다.
하지만 이 환멸의 시대를 건너왔던 것은 여전히 이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해 온 자들과 노동자 계급 자신의 투쟁이었다. 노동자 운동에서 '위기'는 없다! 97년 노동법 총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이 여전히 이 역사를 개척하는 선도적인 주체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환멸'을 청산하고 '위기'의 현실과 절연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노동자 계급 자신의 투쟁이 만들어 내는 현실의 진전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가?

'위기'와 '해체'의 시대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강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다. 우리에게 당면해 있는 긴급한 과제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시대를 넘어서도록 강제하는 힘, 그 자체를 어떻게 지금의 현실에서 만들어 가는가 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은 '비판의 무기'(말로 하는 비판)가 '무기의 비판'(실질적인 운동 세력의 힘으로 하는 비판)으로 전화하는 실질적인 운동의 진전으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서는 일체의 주저함도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 현실의 모순에 맞서 떨쳐 일어날 때, 우리가 보여준 것은 우리의 무능력함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 만들어 내는 현실의 진전 속에서 우리 자신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을 절감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계급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투쟁하고 생존의 벼랑 끝에서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를 때, 기껏 우리가 보여준 것은 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지지하고 엄호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물리력으로 전화된 것은 없다. 대신에 노동자 계급 운동에 대한 회의와 의심, 그리고 분열된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좌절에 빠져 들 뿐이었다.
우리는 작년 7월 총파업의 좌절과 4.2 발전파업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신, 그리고 노동운동의 관료화와 체제내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그 현실을 우리는 절멸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이 현실 운동의 동력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 운동이 강제해 들어오는 '위기'와 '해체'를 넘어서도록 하는 그 힘을 우리는 우리의 실질적인 비판의 힘, 모순적인 현상태와 단절하고 비약할 수 있는 힘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분열되어 있고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현시기 노동운동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실질적인 운동의 진전을 강제하고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패배와 노동운동의 체제내화가 유발하는 위기란 근본적으로 계급 정치의 위기라는 점에서 극복을 향한 진전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모색하는 운동 세력이, 강제된 바로 이 현실로부터 자신들의 '차이'를 극복하고 계급 투쟁의 전선 속에서 단일한 정치 세력으로 결집되어야 하며, 이로부터 우리 자신 또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사상·이념적 '혁신'도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차이'란 각기 독특한 개별자들, 현실적으로 개인들의 독립성에 기초한 개별화를 의미할 뿐이다. 개개인의 차이가 강조되면 현실에서 '무기의 비판'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이 단일한 사안에 대해 단일한 행동을 취하고 단일한 투쟁 전선을 구획하지 않는다면 현실 운동의 진전은 이룩될 수 없다. 여기서 '차이'란 단일 전선을 구획하는 틀 안에서 상호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라도 단일 전선 밖으로 확장하는 개별적인 원환들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여전히 독립적인 개별자들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계급은 부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 운동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현실의 과제를 우리 스스로 부여잡고 현재의 상태로부터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차이'에 기초한 '연대'가 아니라 현재의 기반 위에서 현재를 극복하는 실천으로, 즉 노동자 계급 투쟁의 역사 자체를 현재적 관점에서 계승하면서 '혁신'해 가는 투쟁으로 발전시켜 가야한다.

노동자 계급 운동의 정치화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세계사적 경험을 포함하여 한국에서의 80년대 '당 건설 투쟁'을 '당의 물신화', 또는 '당 만능주의'로 비판하거나 아니면 역량 부족과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당'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단일한 조직을 건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정치전망과 정치활동의 상에 대해 먼저 합의하지 않고는 조직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적어도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자 계급 정치의 위기 극복이라는 과제를 부차화하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노동자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모색해 온 세력들은 각기 의회 대중정당 건설 투쟁, 전선체 운동, 평의회 운동,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운동, 전위정당 운동 등등을 자신의 관점 속에서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우리는 분열되어 있었고 각기 자신의 경로를 따라 독자적인 길을 걸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의회 전술이든, 전선이든, 현장권력체 또는 대체권력 형태(평의회 포함)든 간에 그것들 각각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화를 위해 불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 조직들이 독자적으로 이 전체를 아울러 추진할 수 있는 정치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런 사업들 전체를 아우르는 힘과 역량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체는 없으며 남한의 모든 노동자 계급 정치 진영의 총역량으로 보더라도 이들 사업 전체를 추진하기에는 한참 역량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각 단체별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이들 사업들을 추진함으로써 동일한 사안에 대한 동일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각 단체마다 사람들이 중복적으로 배치되고 때론 특정 사업 영역에서는 서로 대립되기도 하는 식의 총역량의 분산을 낳고 있다.
게다가 각 조직들이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서 역량의 부재와 한계로부터 자기 자신의 조직을 지키는 방식은 타 조직의 투쟁 방향을 비판하고 자기 조직의 투쟁 방향을 옹호하는 자기 조직 중심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흔히들 말하는 정파 운동의 폐해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분산되어 있는 역량들은 각 조직 중심으로 인해 대립과 불신을 조장하고 타 조직의 입장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에 나서는 폐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이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비판적 비판주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이런 사업들 전체를 아우르는 투쟁 방향과 일관된 행동 방침을 결정할 수 있는 조직의 건설이다. 즉, 현재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특정한 어떤 방식의 사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단일한 입장과 행동 통일을 모색할 수 있는 조직적 메커니즘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더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의회 전술이든, 전선이든, 평의회든 간에 그것들 어느 하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 전체를 특정 정세에서 일관되게 모아 세우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진해 갈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건설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힘'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세력들이 하나로 결집해서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일관된 조직적 틀 안에서 해결해 감으로써만 현재와 같은 계급 정치 세력의 분열과 역량 부재의 질곡 상태를 극복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선거 투쟁에, 또 일부는 평의회에, 현장 조직에, 전선체에 각각 매달리면서 서로를 비판하거나 아니면 자기 조직 위주로 투쟁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 안에서 이들 현안들을 일관된 관점으로 통일시키고 전국적인 관점에서 공동 대응해 가면서 물리력을 장악해 가는 그런 조직을 건설함으로써만 서로의 분열과 역량의 한계로부터 오는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직건설이 단지 하나의 조직형태로 묶인다고 행동의 통일과 역량의 극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동단결'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이와 같은 조직은 그들 성원들에게 전국적인 관점에서 공통의 행동 반경과 사상적 지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개인들의 이해와 사유 방식, 자기 정체성 등은 훨씬 더 다양하다. 따라서 모인다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내용과 조직적 활동 체계 안에서 모일 것인가 이다. 이 체계 안에서 각 정파들은 분파를 형성할 권한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의회 전술과 현장 권력체-대체 권력체('비국가')를 형성해 내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사실, 여기서 의회 대중 정당과 평의회, 전선체 등은 이러한 조직에 의해 행동 방침과 투쟁 방향을 공통적으로 결정해 가야 할 사안이다. 노동자의 힘은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조직을 '노동자계급정당'이라 명명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념 자체가 아니라 성격과 내용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열려 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이와 같은 투쟁의 방향과 행동 방침에서 공통의 지향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의 '사상'적 지반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사상'적 지반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잡는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노동자 계급의 정치화'라는 테제를 우리가 인정함과 동시에 공통의 지향태로서의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사회'를 인정한다면 공통의 지반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이념적 동일성은 결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공통의 사상·이념적 지형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극복해 가려는 자세를 갖는 것과 동시에 이를 형성할 수 있는 조직 메커니즘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아울러 이런 측면에서 과거 조직적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겪어야 했던 경험의 폐해와 정파 운동의 습성을 벗어나는 것이 현재의 진전을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로 되는 자세이다. 누구는 의회주의라든가, 또 누구는 전위주의라든가 하는 식의 딱지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를 노동자 계급 정치 운동 세력 전체의 성과로 받아 안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실, 그들 각각의 영역은 그동안 암중 모색의 시절 속에서 각자가 만들어 온 결실이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에서 곧 우리 전체의 자산이다. 따라서 문제는 '차이'의 절대화 또는 극대화가 아니라 이 역사 전체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겸허한 자세일 것이다.
4.2 총파업의 배신은 민주노총의 배신이 아니며, 6.13 지방선거의 성과는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성과가 아니다. 그것은 좌파 모두의 책임이자 성과이며 소중한 자산이다. 패배와 실패, 그리고 위기와 한계는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정치 운동 세력 전체의 책임이다. 또 다시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한 투쟁과 대선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책임을 특정한 집단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되며 노동자 계급 정치 세력의 공동 책임으로 실질화시켜야 한다. 이미 그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이제 그것을 우리 자신의 실질적인 책임으로 전화시키고 현실적으로 작동시키는 조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절명의 과제는 비판이 아니라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투쟁 조직이자 정치 조직이면서 단일한 행동 통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독자적으로 암중 모색해 온 성과와 책임을 이 조직 전체의 실질적인 성과와 책임으로 조직해 가야 한다. 특정 집단, 특정 개인이 이 성과와 책임의 주체인 것이 아니라 오직 노동자 계급 투쟁 그 자체가 요구하는 과제와 임무가 형성해 내는 세력이 이 성과와 책임의 주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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