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재보선 결과를 계급의 역풍(力風)으로

정병기(노동자의 힘 회원)

6·13 지방선거에 이어 8·8 재보선도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오만하지 않게, 그러나 부정부패와 국정에는 단호하게"라는 향후 정국운영 방침을 내놓았다. '과반수+2'의 절대다수당에 걸맞게 책임정치를 주도해 나가되 현 정부의 권력형 비리와 국정혼선에 대해서는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벼르는 것이다. 반면 산 넘어 산을 맞은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후보직을 내놓아야 할지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선거 다음날 기자간담회에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신당 수용, 재경선 약속, 승복"이라고 적힌 메모지를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 승리의 허구와 민주당의 위기

민주당은 광주 북구갑과 전북 군산 두 곳에서 승리하였을 뿐, 2000년 선거에서 승리했던 나머지 5곳을 모두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했다. 득표율 면에서 보더라도, 민주당은 4.1%를 끌어올린 경남 마산을 제외하면, 모든 선거구에서 하락을 거듭했다. 게다가 승리한 두 지역에서조차 각각 약 20%와 10%씩의 지지율 하락을 보이는 등, 최고 하락율은 25.4%(인천서구 강화을)에 이르렀다. 지난 지방선거에 이은 사상 최대의 패배가 아닐 수 없다. 반면 한나라당은 부산과 경남 마산에서 떨어졌으나 전반적으로 지지율이 상승하여 전체적으로는 민주당에 비해 10% 가까이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이 통계만으로 보자면 한나라당의 승리는 자축할 만하다.

그러나 양 선거 모두 정치판 내에서는 한나라당의 승리이나, 국민 전체로 보면 정치혐오증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낮은 투표율을 거론치 않는 사람이 없으며, 여론은 자못 놀라는 기색마저 보인다. 그것은 당연히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정치혐오층은 더욱 증가한 것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48%의 투표 참가 중 50%를 조금 넘는 수치여서 전체 유권자들의 25% 정도에 불과했다. 이번 재보선의 투표참가율은 더욱 낮아 29.6%에 머문 것이다. 크게 잡아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60% 대라고 하더라도 전체 지지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상이변으로 투표참가가 불가능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과연 30%도 되지 않는 투표참가율과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지율로 얻은 승리를 희희낙낙할 수 있는 것인가?

정치혐오증의 결과와 '정풍(鄭風)'

새천년이 시작된 지 불과 2년, '새천년' 이데올로기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붉은 악마'보다 강했던 '홍3' 비리의 결과였다. 80%를 살리기 위해 20%를 희생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한 구조조정의 실상은 대통령 친인척을 비롯한 권력층의 품위유지비 조달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DJ와 민주당에게 일정하게나마 기대했던 유권자들은 투표소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나라당으로 돌아서기에는 '붉은 악마'의 정서가 용서치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 은폐 조작을 운운할 필요 없이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아들의 병역의무를 기피하려고 한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당수로써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가 '신성한' 병역의무를 기피한 것을 용서하는 나라인가? 투표 경향이나 기권율로 계산해 볼 때, 한나라당의 지지층은 20%에서 25%대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그 파렴치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계급적 입장에서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제도권내의 좌우, 어디를 보아도 이 나라 국민들이 눈을 둘 데가 없다. 유럽의 상황이라면 히틀러나 무쏠리니와 같은 파시즘 정권이 성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상황이다. 별다른 제도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시선은 당연히 제3자에게 돌아간다. 정몽준 의원의 인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연유하는 '바람'이다.

민주당의 선택과 양대 정당의 기로

민주당 주도층의 살길은 '노풍(盧風)'과 '정풍(鄭風)'의 풍향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부패와 반민중적 정치로 드러난 '새천년'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지배이데올로기도, 지배층이데올로기도 아니게 된 것이다. 우리 정당사가 항상 그래왔듯이 새로운 정권창출을 위해 그들은 또 다른 이름의 정당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노풍'만으로는 역부족인데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그들이 살길은 분명 신당 창당이지만, 이 바람 저 바람에 휩쓸리는 그들은 그러나 너무나 허약하다. 그래서 그들은 병역비리 즉 '병풍(兵風)'이라는 맞바람을 놓고 있는 것이다.
신당 창당과 '병풍' 전략의 목표는 반이회창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이회창이 '병풍'으로 쓰러진다 하더라도 20% 가까운 보수지배층의 이해관계는 쉽사리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설사 반이회창 연합의 성공으로 한나라당의 집권이 실패한다하더라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20% 가까운 보수진영의 존재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민주당에게 더욱 심각하다. '노풍'을 효과적으로 소화하여 더 큰 바람을 일으키든, '정풍'과의 조화를 통해 반이회창 연합을 구축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든, 보수와 진보의 사이에서 그들의 존재는 모래 위의 성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국의 자유당이 보수당과 노동당의 사이에서 사라진 역사적 경험을 되새겨 볼 일이다.

진보정당의 기회, 그러나 계급의 역풍(力風)으로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진영의 위기는 진보진영의 기회이다. 득표율의 추이만 보더라도 민주노동당이 6·13 지방선거의 승기를 타고 출마지역에서 득표율을 배가시켰으며, 사회당도 청진당 시절의 지지율을 세배로 확대하였다. 유럽의 노동당·사민당과 보수당의 구도가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는 전조임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선거판을 중심으로 계급의 역풍(力風)을 일으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노풍과 정풍이 제도권 내에서 일어난 골짜기 안의 바람이라면, 계급의 역풍은 계급이라는 고기압의 형성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바람이다. 골짜기 안의 바람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동산도 넘지 못하는 작은 바람이라면, 고기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태산을 뽑아 들어올리는 역발산(力拔山)의 바람이다. 계급의 역풍은 이러한 고기압의 형성에 기반해야 한다. 보수진영 약화의 반사이익이나 좌파적 대안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상대적 선택이나 비판적 지지의 결과는 역풍이 되지 못한다. 보수진영의 바람이 강해지면 이러한 바람은 오히려 그 힘에 가세하거나 쉽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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