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화사업이란
녹화사업이란 전두환 집권 초기에 강제 징집된 학생운동 출신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으로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마련된 계획. 80년 이후 군에 강제징집된 학생들의 수는 약 1,100명으로 추산된다. 실상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81년 11월부터 83년 11월 사이의 입대자 447명 가운데 82년 9월부터 녹화사업이 외형상 중단되는 84년 11월까지 모두 256명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보안사(현 기무사)가 실시한 이 사업에 따라 강제징집된 사병들에 대한 사상개조가 진행되었고 엄청난 가혹행위가 가해졌다. 이 중 가장 치졸한 행위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에 대해 관제 프락치 공작을 강요한 것이었다. 프락치행위를 강요당한 학생들 중 일부는 엄청난 고통 끝에 끝내 살해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녹화사업과 강제징집은 단순히 보안사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문교부, 병무청, 국방부, 육해군본부, 검찰 등 정부의 여러 부서가 간여한 종합적인 범죄행위였다.
녹화사업, 가장 비열한 국가범죄
“대통령이 와도 보여줄 수 없다” “대한민국이 거꾸러져도 안된다” “국민들이 다 죽어도 보여줄 수 없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 조사단이 21일 기무사령부를 방문해 80년대 녹화사업(대학생강제징집)문서의 공개를 요구할 당시, 기무사 장성의 입에서 쏟아진 말들이다. 천 여 명이 넘은 학생들이 녹화사업의 대상자였건만, 정점에 서서 젊은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은 이에 대해 콧방귀도 뀌지 않고 있다.
현재 위원회에 접수된 85건 가운데 공식적인 녹화사업 관련자는 정성희, 한희철, 이윤성, 김두항, 한영현, 최온순 등 6명. 이들이 목숨을 잃은 지 20여년이 다 되어가지만 녹화사업의 실체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이 집권한 80년 당시,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되거나 6개월 정도의 단기형을 살고 출옥한 사람들, 심지어 단순집회 관련자들도 군대로 보내졌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강제입영된 사람들 가운데는 눈이 나빠 이미 신체검사에서 면제를 받은 사람들이나, 6대 독자, 소아마비 장애인까지 군대로 끌려갔다. 녹화사업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강제징집됐던 이들이 제대할 시기에 시작되었다. ‘운동권 학생’들을 아무리 군대로 보내도 학원시위가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었고, 강제 징집됐던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갈 시기가 되자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최경조의 증언이다. 보안사 간부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불온낙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전두환이 “야, 최경조, 너 인마 뭐하는 거야”라고 질책했다는 것. 한홍구교수(성공회대)는 “보안사의 특성상, 그리고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두환과 보안사의 특수한 관계를 놓고 볼 때 당시 전두환의 이런 발언은 ‘명백한 지시’였다”고 밝혔다.
녹화사업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된 것은 84년 3월 제적생과 해직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이다.
여론에 부딪친 정부는 84년 9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했지만 녹화사업이 전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은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이용한 프락치공작과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이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했다. 이후 보안사령부는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녹화사업은 국가권력의 핵심부가 관계기관을 총동원하여 자행한 국가범죄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의 힘으로 잡아가둔 전직 대통령들을 ‘화해’라는 명목으로 집으로 모셨듯, 전두환·노태우에게 녹화사업에 대한 면죄부마저 주어질 상황이다.
전현정 / jhj@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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