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설 dllp21@kdlpnews.org
“저, 저, 우혁이 아버지는, 최우혁 아버지 저 있제? 총무 아버지. (아들이) ‘강제징집 가면 나는 죽는다’고 피해 다녔어. 지네 엄마가 ‘군대 안 가면 안 된다’고 세상에, 온 동네, 집안 사람들 출동해 갖고 집에다 잡아다 놓고. 우혁이가 잡혀가면서 자기 엄마보고 그랬어. ‘어머니, 오늘 못 보면 나는 못 봅니다.’ 그렇게 가서 죽었다고. 그래, 그 엄마가 자기가 죽였다고 자기가 죽였다고 하다가 정신이 돌아버려 갖고 물에 빠져 죽었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국회앞 천막농성 4백21일을 기록한 이경순, 최하동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민들레>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당시 유가협 총무였던 최봉규씨(72·서울 신림본동·사진)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1987년 9월 8일 군복무중이던 아들의 죽음 이후 두달만에 뇌일혈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뇌졸증, 실어증,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 강연임씨는 1991년 2월 19일 한강에 투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학생운동을 그만두게 하려고 병무관계자에게 손을 써서 막내아들의 입대일자를 앞당겼던 어머니는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내내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막내아들 최우혁은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 때 구류를 살기도 하고 교내시위 도중에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발을 다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최씨 부부는 아들을 말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1987년 4월 입대한 최우혁은 60여단 경비소대에 배치를 받았다가 나중에 정보과 서기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당시 군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전날인 1987년 9월 7일 오후 10시부터 자정까지 상황실 근무를 마친 최우혁 이병은 상황실에 있는 휘발유통을 들고 쓰레기소각장으로 가서 몸에 불을 붙였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입대한지 1백33일만의 일이다.
하지만 군당국의 발표는 너무도 허점투성이였다. 장승처럼 꼿꼿이 서서 불에 탔다는데 상반신과 하반신의 화상정도가 같은 점, 분신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병들이 철모에 담아온 흙탕물로 불을 껐다는데 철모가 깨끗한 점, 분신환자의 경우 바로 죽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즉사했다는 점 등이다. 게다가 군은 가족이나 변호사의 입회 없이 부검을 실시했다.
나중에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알려진 보안사의 요시찰 서울대생 명단에 최우혁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나 부검에서 발견된 손목의 상처, 군대 특성상 신병이 “화장실에 간다”며 일석점호에 빠지기 어렵다는 점, 휘발유통을 들고 쓰레기소각장으로 가기까지 목격자가 없었던 점 등에서 타살 가능성이 제기돼 왔지만 군 당국은 유서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근거없이 “불우한 가정을 비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여의도 국회앞 4백21일 천막농성의 결과로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최근에는 허원근 일병에 대한 의문사 진상조사가 성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군의문사의 경우 최우혁 이병 사건처럼 결정적인 증언이 나오지 않아 제자리에 맴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가 나타나더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최봉규씨는 당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시한이 오는 16일로 마감될 예정이라 마음이 급하다. ‘조사불능’으로 결론이 날 경우 영원히 의문의 죽음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을 개정해서 강화해야돼. 특별검사제도 마련해야 되고. 이제껏 뛰어다녔는데…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될 것 같아.”
[ 102호] 9.2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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