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민주노총 정책국장
"2002년 8월 25일 새벽 4시30분 제주 한라병원에 용역깡패가 동원되어 파업 중이던 노조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라는 보도를 접하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흑백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러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나 혼자일까? 파업 사업장에 깡패를 동원하고 경찰을 투입하여 파업중인 노조원을 강제 해산시키고 노조 지도자들을 구속하는 모습은 흑백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10∼20년간 우리사회의 모든 부문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부가 노동자를 배제하고 노동자를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노동정책이 아닐까.
민주화와 새로운 노사관계를 내세우고 있는 김대중 정부는 2.8합의를 추진하고 노사정위원회를 만드는 등 새로운 노동정책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경찰력과 사법적인 대응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어 여전히 노동 배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조합주의적 색채를 가진 새로운 노사관계를 시도하는 것으로 비추어지던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과거의 행태에서 탈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김대중 정권 출범초기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서 현 정부가 선택한 노동정책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겠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형성해 가는 정치경제적 이행과정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구조조정시기에 김대중정권이 언급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노동과의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인 노동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실업대란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아 노사관계를 갈등관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상황 대처적 성격을 가진 소극적 정책을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권이 취한 이러한 선택은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 전반에 나타나게 된다. 정리해고와 파견법 등 노동시장유연화 과정은 노동과의 협상을 통해 추진되는 듯한 외양을 갖추고 있으나, 실제 적용과정은 노동의 저항을 뚫고 추진되는 돌파형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했던 것은 노동과의 대화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새로운 노사관계에 있다기보다는 노동계가 정리해고를 수용했다는 정치적 성과를 챙기는 것이었던 셈이다.
노사정위원회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시스템으로 제도화하려는 노사관계 전반에 대한 전략에 근거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위기국면을 탈출하는 위기관리기구로서의 임무가 중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가 절실했음에도 실업자 조합원 자격, 노조전임자 임금, 복수노조, 산별노조 강화를 위한 제도 및 행정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시스템의 부조화가 심각해지는 문제를 낳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IMF에 의해 주도되면서 유연화와 사기업화(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노동조합 약화라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부에 의해 시도된 신노사문화운동은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라 할 수 없으며 과거의 노사협력 캠페인이나 노사화합선언의 연장선 수준에서 진행되어 현 정권이 가지고 있는 노동정책의 수준을 가늠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선택은 노동정책을 경제정책의 하위 정책으로 위치지웠을 뿐 아니라 공안부처에 의해서 노동부의 노동행정이 좌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부 장관이 지역안배와 경제부처 출신의 자리 마련을 위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파업현장의 경찰투입이 공안부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경제 구조조정과 함께 제시되었던 정부와 정치에 대한 구조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정치부문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져 정경유착과 부패고리를 차단하여 정치를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했으며 행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시민에게 봉사하는 행정시스템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개방형 인사조차 실효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정도로 개혁의 사각지대에 있다.
정부부문의 개혁 부재로 정부는 관치에 안주하여 군림하고 있으며 정치는 정격유착의 고리에 묶여있어 개혁의 자리를 퇴행이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경제 상황과 노동시장의 상황은 변화하는데 정부와 노사관계 시스템은 변화하지 않는 관치와 정경유착, 억압적 노동정책에 갇힌 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삶의 질 하락에 고통을 받고 있으나 이를 해결할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미래지향적인 노사관계 프로그램 없이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상황대처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경제는 시장경제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노동시장 상황에 맞는 노사관계에 대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못했다.
또 정부부문과 정치부문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개혁의 부조화로 인해 노동자들은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 따른 피해를 그대로 부담하면서 이에 더하여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부담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투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권의 선택 또한 뻔한 수준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흑백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 102호] 9.2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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