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경(노동자의 힘 회원)
인천의 한 허름한 술집. 으레 있는 격렬한 논쟁도, 술기운에 빗댄 넋두리들도 사그러들고 그만그만한 고민과 힘든 매일에 지쳐 암담한 표정으로 모두 고개를 떨구었을 때, 우리들 중 하나가 나직하게 노래를 시작한다.
'한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안고...'로 시작하여, '...암흑의 벽에 흰옷의 시를 쓴다.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속에 이 흰옷 언제까지나...'로 끝맺을 때는 다함께 목청이 터져라 불렀던 '사이공의 흰옷'이다. 이 노래는 1960년대를 전후하여 베트남 학생운동에 투신한 한 여학생의 실화를 다룬 동명의 소설과 함께 내 마음속에 처절하고도 강인한 느낌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인공 '홍'이 학생운동부터 시작하여 당 활동가, 투사로 성장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특히 교육투쟁과 등록금투쟁을 전개하고, 후배활동가의 양성을 위해 일부러 낙제하는 것이나 학내 세포를 조직하는 일 등은 우리의 학생운동과 놀랍도록 닮았다. 교사나 간호사가 되길 꿈꾸던 모범생 '홍'이, '호앙'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고 조직하면서 활동가가 되었던 것은 당시 엄혹했던 베트남 상황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치열한 삶의 태도-학업에 소홀하지도 않고 학비를 직접 벌면서도 학습과 조직활동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점과, 운동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삶 자체로 체화시키려 노력하는 것 등은 오늘날의 활동가들에게 자극을 주기도 한다.
"살아가는 일 전체 - 밥먹고, 빨래하고, 공부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 어느 하나라도 튀어오르거나 처지지 않고 혁명이라는 실에 의해 수미일관하게 꿰어져 자연스럽게 체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혁명의 과업을 무슨 특별한 일로 물신화시켜 버리지나 않았던가. 그리하여 정작 혁명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시점에서 오히려 혁명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묶어버리지나 않는가."
'홍'은 그를 학생운동의 길로 이끌어준 동지이자 연인인 '호앙'의 소개로 항전구에 들어가게 되나 곧 체포된다. (애정 문제가 활동에 지장을 줄까봐 서로 고백하지 못했던 가련한 연인들은 후에 '호앙'이 사형선고를 받고 십수년간 투쟁하면서도 비밀 편지 등으로 애정을 가꾸어 나가게 된다. 항전구에서 재회한 동지에게 '홍'은 "사랑의 최고 형태는 실천 속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이 원칙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의 중반부터는 '홍'이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어떻게 옥내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지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고문실과 독방을 오가는 것은 곧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것 같은 처절한 고난의 순례였다...... 이 방은 위대한 혁명의 선배들이 거쳐 간 곳이다. 그들의 체취, 숨결이 이 방에 배어 있는데 내가 어찌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가혹한 고통을 극복해 낸 '홍'이 4년만에 석방되어 항전구에서 동지들과 어머니를 재회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그의 투쟁은 소설로 씌여졌고, 시로 만들어졌으며, 먼 나라인 이곳에서 노래가 되어 불리우고 있다. 비단 베트남에서뿐이랴. 독재와 제국주의에 항거하다 쓰러져간 민중들의 역사는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부끄러움으로 인한 불편함이 떠나지 않았다. 과연 운동이 내 삶의 전부였던가? 일상적으로 조직하고 학습하고 실천하였는가? 입으로만 혁명을 말하며 유연한 정세를 탓하는 것은 얼마나 안일한가. 책장을 덮고 혼자서 불러보는 노래 '사이공의 흰옷' 가사는 내 삶을 질타하는 동시에 '치열하게 살라'고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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