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프롤레타리아 학교(3)

남신동(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박사과정)

[조선학생혁명당]을 배후에 둔 고학당은 1928년을 기점으로 하여 "무산운동의 엄정확립"의 방향으로 자신의 위상을 쇄신하였다. "모든 것은 학생자치의 힘"이라는 구호 아래 "교양과 운동, 서무, 재무의 각 부서"의 제반업무는 학생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또한 학생들의 사회주의적 정치교양교육을 위해 '자치적교양방법'이 도입·실시되었다. 자치적교양방법은 그 명칭대로 전적으로 학생들에 의해 전담되었으며, ① 사회과학학습, ② 시사토론 혹은 정세토론 ③ 좌담회(학급운영회의)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30년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자치적 교양방법 및 학우회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사회과학학습은 1931년 7월 고학당이 해산되기까지 지속되었다. 고학당 말기에 입학한 이종 선생에 따르면, 당시 사회과학 학습은 기숙사에서 진행되었는데 기숙사 방별로 대략 7∼8명이 1개 팀으로 조직되어 주 1회 정도 토론회가 이루어졌다. 저학년 학생들은 주로 {資本主義の 機巧, 자본주의의 기교}, {社會主義 大要, 사회주의 대요} 등과 같은 사회주의 입문 서적류를 읽고 토론했다. 이 서적을 통해 고학생들이 읽고 토론했을 새로운 이상사회에 대한 설명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생산에 따른 사회적 소유이다. 빈자가 없는 사회, 반목이 없는 사회, 투쟁이 없는 사회,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가 없는 사회, 압박하는 자와 압박당하는 자가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생활의 사회, 그것이 우리의 이상이다." (堺利彦, {改正 社會主義 大要}, 東京 : 無産社, 1928, p.30.에서 인용)

대도시의 하층집단으로서 겪었던 극빈한 생활경험, 그리고 객관적 기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고학생들에게 빈부격차문제, 불평등 문제, 인간소외 문제 등 계급사회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의 대안적 사회구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내면적으로 '공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 환경과 학습에서 나는 막연하던 희망과 앞길에 주관이 서고 의식화되어 갔다. 지금까지 허위와 불신, 증오와 공포의 콤플렉스 속에 살아왔고, 인간관계가 그런 것으로 여겨왔는데 진실과 신뢰, 애정과 화합의 세계를 체험한 것이다. 미로의 협곡에서 트인 지평을 본 셈이다. 세속에서 추구하는 부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진 고난을 겪으며 소외된 청년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사도와 각지방에서 올라온 팔면 부지의 얼굴들이 한뜻 같은 길에 어울리는 동지애의 삶의 보람을 느끼었으며, 듣고 본 사회주의 세계관이 이상을 갈구하는 젊은 피에 신화로 스며들었다"(이종 회고록. 강조는 필자)

인용문에서 위 개인이 "듣고 본 사회주의"라고 표현한 대목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9년도에 설립된 [조선학생전위동맹]의 행동강령은 단순히 선언적인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다. - 강령 및 행동강령은 당시 춘경원당 공청계에서 책임 간부로 활약하고 있었던 고학당의 정관진(청년운동부)이나 김태래(학생부)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각 항의 내용들은 고학당에서 적극적으로 구현돼온 것들이다. 고학당은 공교육 이념을 구현하여 무상으로 교육기회를 보급하였으며, 남녀공학제를 운영하여 교육기회 배분에 있어서 여성차별을 극복하였다. 또한 1920년대 중반 이후 "모든 것은 학생군의 힘으로"라는 표어 아래 학생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등 교내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구현하였으며, '자치적교양방법'을 통하여 학생들의 자유로운 정치사상학습을 보장해 주었다. 즉, 설립이래 누적돼온 고학당의 집단적 경험, 민주적인 인간관계, 학교문화가 전위동맹의 이념적 '모태'가 된 것이다. 요컨대, 위 개인이 고학당을 매개로 획득하게 된 사회주의는 고학당이라는 '생태학적'인 환경에서 체험했던 내용 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번 호(12호)에서 인용되었듯이, 그에게 사회주의는 "고학당 정신"과 동일시된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고학당에서 시작된 비밀결사운동이 일경에게 완전히 파악되면서 대다수의 핵심간부들이 검거되었다. 고학당의 [학우회] 활동은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일제는 고학당의 교육활동을 치밀하게 감시하였고 불시에 기숙사를 덮쳐 '불온서적'를 압수하거나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메이데이 전날에는 "위험 인물"의 '예방구금'도 이루어졌다. 총독부 학무국은 사립학교규칙을 근거로 1931년 4월 고학당에게 폐쇄조치를 통보했다. 자진해산하지 않은 경우 헌병대가 출두할 기세였다. 더 이상의 존립이 불가능해지자, 1931년 7월 11일 교사와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현 상황을 성토하며 비장한 분위기에서 고학당의 깃발을 내렸다. 고학당은 폐쇄되었지만, 고학당의 경험은 개인들의 삶에서 지속되었다. - 해방 후 남로당 2인자로 알려진 김상룡이 고학당의 출신이며, 1920년대 사회주의 학생운동조직의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였던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 이능종, 유축운, 김종원, 이원봉, 최진석, 허미순, 정윤필, 조성택 등이 고학당의 재학생들이었으며, 이들과 더불어 강덕선, 허균, 홍종언, 정후균, 김한동, 김두진, 이종 등 고학당 출신의 다수가 해산 이후에도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조직운동에서 유명·무명으로 활약하였다.

"거기 들어가서 물론 일반적인 그런 배움도 있었지만, 주로 그때 선생들의 말이라던가 또는 상급생들의 행동하는 그런 그 모든 것에서 많이 체험을 했습니다. 체험을 하고서 그때 비로서 막연하나마 그 일생을, 이렇게까지 이런 사상적인 기초, 조금도 허물어뜨린 적이 없습니다.."(이종 구술, 1996.8.20.)

고학당은 해방 후 사회주의 교육이 소련으로부터 이식되기 이전부터 한국 사회 내부의 역동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최초의 사회주의 교육기관이다. 고학당에서 이루어진 사회주의 교육은 외부의 정치조직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나, 외국의 특정 교육이론이나 모델을 모방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에서 축적돼온 경험에 기반한 고유한 특질을 갖춘 교육이었다. 마지막으로 고학당이라는 "유일한 무산자 학교"는 1920년대 계급운동과 민중교육운동의 특정한 결합물이며, 예외적인 한 사례는 아니다. -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형태로 전개된 사회주의적 교육실천들은 적잖게 존재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동 인물이었던 김사국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1923년도 3월 간도지방에서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사회주의 운동의 간부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간도 용정지방의 {동흥중학}의 경우 1922년경 주청송, 박윤서 등이 관여하면서 1925년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교원과 학생들에 의해 학교운영의 헤게모니가 장악되었다. (김책, 김홍선, 나동옥, 문태화, 박기주 등 다수의 조직운동의 간부들이 바로 동흥중학의 출신들로 확인된다.) 또한 전평 적색노동조합의 경우 조합 산하에 100 여 개의 노동야학기관을 운영하며 맑스레닌주의를 교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현재 기초적인 수준의 사실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1920년대 사회주의 사조의 등장이라는 사회변화에 따라 위상, 교육내용과 형식상의 특질, 그리고 기능 면에서 새로운 교육으로서 사회주의적 교육이 역사공간에 등장하였을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식민지기 사회주의적 교육실천 혹은 노동교육의 역사는 우리들의 집단기억에서 "폐쇄"되어 있는 지점이다. 그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할 때 현재의 진보적 교육운동의 자리 매김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끝>


<조선학생전위동맹 강령 및 행동강령>

[강령]
1. 우리는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교육에 항쟁한다.
1.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세포자 양성을 기한다.
1. 우리는 조선학생의 당면문제를 과학적으로 自決하는 것과 동시에, 공고한 조직을 기한다.

[행동강령]
1. 학생의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자.*
2. 학문의 연구 비판의 자유*
3. 조선내 교육기관은 조선학생 본위를 주장하자.
4. 교육상 용어는 조선어 기본을 주장하자.*
5. 조일 학생의 민족적 차별 특혜 철폐를 주장하자.
6. 종교배제
7. 입학생의 신분 및 재정조사 철폐*
8. 남녀 학생의 교육적 평등을 주장하자. *
9. 사상단체 가맹의 자유*
10. 남녀 학생의 사교 자유
11. 교내 학생회의 자치 확립 *
12. 직원회에 학생대표 참가를 주장. *
13. 最高 수업료제 확립
14. 수험금 및 입학금 철폐*
15. 학생 필요 이외의 경비 학교부담
16. 수업료 납입기간을 1년간으로 연장.
17. 기숙사생 외출 면회, 통신 자유.*
18. 선수 본위 운동제 폐지.
19. 교과서 선택의 학생 본위
20. 모든 교내 선거의 민주주의화. *
21. 조선좌익운동지지
22. 국제적 좌익운동지지.

출전: 鐘路警察署, "三一運動記念日ニ際シ不穩計劃ニ關スル件", 京鐘警高秘 第2601號, 京城地方法 院檢事局, {思想ニ關スル情報綴和} 第三冊, 昭化5年(1930) (필자 번역 / *는 필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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