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변정필(노동자의 힘 정책위원)
(이 글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러시아의 저항적 좌파지식인 보리스 카칼리츠키가 터키의 한 좌파잡지와 가진 인터뷰를 요약한 것이다.)
Q: 에릭 홉스봄이 지난 20세기를 "극단의"시대라고 부르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세대를 과거와 연결시켜주는 역사적 기억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구소련 지식인 중 한사람으로서 "세계를 뒤흔든 열흘"(러시아 혁명)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역사적 과정으로 소련이 해체되었는지 설명해 달라.
A: 기억상실과 문화해체는 "역사의 종말" 프로젝트의 한 요소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테제는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헛소리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단기적으로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이다.
소련의 붕괴는 20세기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의 필연적 결과이다. 러시아 혁명은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단계를 거쳐, 결국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끝났다. 국가로서의 소비에트 연방은 끝났지만,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운동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로의 복귀는 혁명의 끝이 아니라, 단지 다른 단계일 뿐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단계이지만, 새로운 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을 창출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1917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Q: 소비에트연방에서 자본주의의 복귀가 어느 정도까지 완성되었는가?
A: 오늘날의 러시아는 터키나 멕시코 같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러시아 경제와 사회의 모든 측면이 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강력한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 주변부 모든 국가에서는 전형적인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심지어 1차대전 이전에 이 문제를 검토한 바 있다. 현재 러시아의 고유한 특징은, 경제와 사회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의 맡은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발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교육받았고, 노동자들은 과도하게 숙련되었고, 생활수준은 경제가 60퍼센트 이상 붕괴한 시점에도 자본주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선택은 너무도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러시아 사회의 최종적 파괴를 가져다 줄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Q: 이전에 소비에트의 시민이었던 사람들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해체 이후에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과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이전의 소비에트 시민들은 이런 성과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A: 사실 소비에트 연방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하나의 동화처럼 되어가고 있다. 때로는 아름다운 동화이고 때로는 끔직한 이야기이다. 또는 둘 다이거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아 있는가이다. 교육, 주거, 의료, 노동조직 등은 과거 소비에트와의 지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러시아를 선진사회로서 유지해 주고 있다. 러시아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이런 요소를 제거하는 것, 탈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주변부가 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를 대중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실패했지만, 소련을 현대화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 약속과는 반대로 주변부의 현대화와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거나, 아니면 혁명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Q: 러시아에 새로운 사회주의세력이 형성되었는가? 그들은 스탈린주의적 과거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가? 러시아연방 공산당은 소련공산당(CPSU)의 유산을 얼마나 계승하는가? 또 어느 정도로 새로운 정당인가?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상태는 어떠한가?
A: 1990년대 러시아에는 반자본주의적 세력이 없었다. 자본주의의 복귀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단지 저항세력이 파편화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객관적 이유가 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파녀화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러시아연방 공산당은 거의 파시스트 당이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당이라고 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파시스트, 혹은 준파시스트와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사실을 직시하자.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당에서 쫓겨나고 있다. 자본주의는 문제가 아니고 러시아의 진짜 문제는 유태인의 음모, 범이슬람계 음모라는 것이 당지도부의 확신이다.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한다. 겐나디 주가노프 당수는 19세기의 러시아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헌팅턴과 후쿠야마 등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재앙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스탈린의 숙청은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숙청으로 파괴의 근원이었던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역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문제는 부패다. 러시아에는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는 이상한 야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은 암담하지는 않다. 공산당을 비롯한 기성정당은 기반을 잃고 있지만, 좌파정당 혹은 민중주의적 정당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민중주의 계열에는 "자유와 인민의 권력당'이 있고, 더 왼쪽에는 신공산당이 있다. 신공산당은 러시아판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좌파통합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기다려 보자.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있고 현단계에서 완전히 낙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정신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맑스, 트로츠키, 마르쿠제 등을 읽고 있다. 사파티스타 마르코스의 책도 번역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부르주아 출판사에서는 체게바라, 맑스의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을 호화로운 개정판으로 출판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의 개정판도 내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다. 물론 유행은 오고가는 것이지만, 소련해체 11년만에 새로운 유행으로 불어오고 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설사 선거정치가 좌파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지만, 비제도적 투쟁에 많은 사람과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Q: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지구화 이데올로기가 전세계에 걸쳐서 그 영향을 증대시켰다. 좌파의 다수가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적·강령적 위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지구화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비젼을 확고히 했다. 맑스없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아주 간단하다. 누군가는 컴퓨터나 휴대전화기를 생산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노동자계급을 재검토하고 재규정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계급구조에 대응하는 새로운 연대가 필요하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위해 더 포괄적인 개념의 노동자가 필요하다. 여전히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Q: 러시아에서 어느 정도까지 사회주의의 복원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이 복원과정에서 어떤 역동성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A: 왕정복고 다음에는 명예혁명이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의 상황은 전세계적 상황에 달려있다. 개인적 판단으로 러시아의 미래는 유럽의 반지구화 운동,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등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A: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Q: 사회주의는 되살아나고 있다. 사회주의의 재도래에 대한 객관적 요구가 있다. 적어도 일정한 사회주의적 요소 없이 자본주의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면한 위기에 대한 탈출구로서 국유화와 규제, 복지제도가 제시되겠지만, 그 자체가 사회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좌파가 사회주의 전략을 채택하지 못하면, 새로운 파시즘이나 민족주의가 좌파를 대체할 것이다. 다시 말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옳았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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