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정미 woodfish@kdlpnews.org
김윤기 열사의 어머니 정정원씨(64·사진)는 아들이 묻혀 있는 경기도 파주에서 언니와 함께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특별히 아들 때문에 옮긴 것은 아니지만 오다보니 아들이 묻혀있는 파주였다.
“처음에는 서울 살면서도 한달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가고 그랬는데, 이제는 먹고살기 바빠서 지척에 두고도 자주 못 가. 그나마 옥탑 살림방에서 우리 윤기 무덤 있는 곳 바라볼 수 있어 다행이지.”
김윤기는 86년 ‘5·3인천직선제개헌투쟁’에 참가했다 구속돼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이후 덕진양행에 들어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측의 야비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협상은 계속 결렬되었고, 공장장과 구사대는 조합원을 구타, 폭행한 것은 물론 노조집단 탈퇴 음모를 조작하고 업무집행방해 및 퇴거불응명령으로 고발하는 등 숨막히는 탄압을 자행했다.
급기야 성남지역에서는 최초로 공장이전이라는 신종 노조탄압을 행함으로써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이에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덕진노조원들은 회사측 탄압에 맞서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교섭 결렬이 계속되는데 격분한 김윤기(당시 25세)는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으로 항의했고 병원에 옮겨지는 도중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때도 미아리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던 어머니는 “한달을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울기만 했는데… 일이랑 유가협 아니었으면 나도 죽었을꺼야”라며 “이렇게 살아온 생각하면 사람 목숨이 정말 질기지 싶어”라고 당시의 심정을 떠올린다. 술을 좋아하던 남편이 간경화로 죽은지 8개월도 안돼 큰 아들을 보내게 된 어머니.
“키울 때는 다 똑같은 자식으로 키운 것 같았는데 막상 윤기 죽고 나니까 큰아들이라는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더라구.”
아들이 죽은 지 1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좋은 것, 맛있는 것 보면 죽은 아들이 먼저 생각난다는 어머니. 3남매를 데리고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아들에게 용돈 한 번 변변히 줘 본 적 없다는 것이 자꾸만 맘에 걸리는 듯 “지금도 넉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정도만 됐어도 괜찮았을텐데... 지금정도만...”이라고 혼잣말을 이어간다. 급기야 “죽을 때까지 양복 한 벌 못해 입히고...”라는 얘길 전하면서는 참아내던 눈물을 떨구었다.
어머니가 구속된 아들을 위해 민가협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한번은 민가협 가족들과 유가협 가족들이 함께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가는 차 안에서 죽은 자식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유가협 가족들을 보며 어머니는 남의 일처럼만 생각했다고 한다.
“난 그 때까지 열사가 뭔지 몰랐지. 그런데 그 때 유가협 가족들 얘기가 내 얘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아들의 죽음에 대해 한 때는 “바보. 죽어서 뭐 한다고, 뭐든 살아서 해야지…”하면서 아들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그래도 우리 아들 같은 놈들이 죽어서 그나마 세상이 이렇게라도 변한게 아니겠어”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어머니.
파주로 이사오면서 유가협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없게 돼서 너무나 아쉽다고 얘기하는 어머니는 “많은 열사 가족들이 유가협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 애들이 자기들만 위해서 그런 일 한 거 아니잖어. 걔들이 하려구 했던거, 다 못하고 죽은 거, 그거 부모가 나서서 마저 해야지. 그래야 자식들의 죽음이 더욱 값지고 의미있어 지는 거 아니겠어”라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 103호] 9.9 ~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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