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 After-9.11 후 1년]테러, 미국 집단적 결속 강화시키는 ‘의례’로

9.11 1년 미국은 지금

김선철/뉴욕 통신원  jollary@yahoo.com
어느 화창한 초가을 아침, 현장에서 혹은 화면을 통해서 목격하게 됐던 쌍둥이 빌딩의 거대한 침몰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의 기본 문법과 이것을 지탱해주던 신뢰(trust)를 무참히 깨어버렸다. 미국인들에게 이 사건은 자신들의 행복한 일상이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켰으며, 이들의 삶이 안락했던 만큼이나 이들 속에선 어마어마한 심리적 공포가 자리잡게 됐다.

역사적으로 다른 많은 곳들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 또한 바로 옆에서 무수한 형제자매가 죽어가는 것은 목격하는 가운데 실성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어느덧 미국인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던 9.11 테러사건의 1주기를 기념해야 하는 때를 맞게 됐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이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고 이와 관련된 보다 성찰적인 논의들도 풍성해졌다.

지난 8월 26일, 미국의 사법부는 테러와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는 자들에게 재판권과 변호사 위임권을 주지 않은 채 행정부가 단독적이고 비밀스럽게 조사ㆍ구금하는 것을 허용하는 테러방지법의 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부시가 추진하고 있는 반테러 정책들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미국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이 판결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갈수록 많은 미국인들은 극우파의 극성으로 인해 미국 민주주의의 원칙이 위협당하는 것이 테러의 더 직접적이고 위험한 효과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아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익 포드햄 교육재단은 얼마전 인종적 다원주의와 문화적ㆍ도덕적 상대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진보적 교사노조(NEA)의 교육계획안을 비판하며 미국적 제도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9.11 교육계획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교사노조를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들은 이에 대해 차이를 인정치 않고 아이들에게까지 증오감을 주입시키는 교육방식이 되려 미국적인 것이 아니라며 반박하고 있다.

위의 두 사례는 9.11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정확히 무엇을 기억하고 전승할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와는 달리 단일한 인종적 혈통도 없고 오래된 공통의 역사경험도 가지지 못한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9.11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우리 의식’ 형성을 위한 아주 중요한 계기와 재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고 역사적 사건은 사람들의 집합적 기억 속에 저장되고, 이는 현재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원료로 활용된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내용으로 기억할 것인가는 특정한 집단의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 관건인 것이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한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해내려는 미국인들의 진통은 쉽게 결론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토론과 협상의 이 과정이야말로 미국과 미국인들의 자기 정의를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9.11은 미국과 미국인들의 집단적 결속을 강화하는 의례(ritual)로써 자리매김되고 있다. 오만한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가로 수천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던 1년 전의 정치적 테러가 미국을 혐오하는 많은 이들에게 순간적 환희를 제공했을지는 몰라도, 그 사건은 지금 미국인들의 집합적 정체감과 내적 결속을 강화시키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생산하고 있다.
[ 103호] 9.9 ~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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