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조합원은 어디로 갔을까?

위기의 과기노조, 해체되는 산별

전주희(노동자의 힘 선전부장)

476명의 조합원은 왜 쫓겨났을까?

9월3일 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하 과기노조)에서는 476명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좀더 정확하자면 과기노조 소속 한국전자통신연구원지부와 한국과학기술원지부 두 지부를 제명처리 한 것이다. 이날 과기노조 중앙위는 40명 중 28명이 표결에 참여해 각 지부의 제명에 21명, 18명이 각각 손을 들었다. 민주노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476명의 집단적인 '조합원 퇴출'은 왜 일어났을까? 이들의 집단적인 '죄명'은 무엇일까?
사태의 발단은 지난 6·13 지자체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기노조는 6·13 지자체 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하고, 선거운동을 위한 정치기금을 내기로 결정했다. 중앙위원 20만원, 조합원 1인당 5천원의 정치기금에 대해 두 지부는 지부의 상황을 고려, 납부 거부의사를 과기노조 본부에 통보했다. 476명은 1인당 5천원(총 278만원)의 정치기금을 납부하기 않았기 때문에, 다시말해 납부 '거부'의사를 밝힌(이는 명백하게도 노조 규약에 명시된 명령불복종 죄목에 해당한다!) 지부간부를 둔 탓에 졸지에 과기노조로부터 퇴출당한 것이다. 이틀 후 과기노조 차수섭 부위원장과 이기원 사무처장은 사퇴서를 제출했다. "지부를 제명처분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 2인은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과기노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투쟁을 진행해왔던 결과이며, 전태일상에 빛났던 자랑스런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집단인 과기노조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며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과기노조가 '해방이후 최초의 소산별노조'로서 합법화를 쟁취한지 꼭 8년째 되는 날이다.

불행의 씨앗-정치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다.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동안 과기노조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을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최근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세간이 떠들썩하지만 과기노조의 정치세력화는 그보다 훨씬 앞선다. 95년부터 지방의회에 '노동자 후보'를 내왔고, 그 중 4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2002년 지자체 선거에도 '우리후보'를 냈다. 그리고 조합원 1인당 5천원의 정치기금을 결정했다. 제명당한 2개 지부도 참여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두 지부의 생각은 다르다. 김세동 과기원지부장은 "과기노조의 정치세력화 작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저 선거철이 되면 기계적으로 참여하고 운이 좋아서 몇 명의 의원을 배출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번 선거만 해도 후보는 철저하게 상층부에서 결정했으며,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작업은 전무합니다. 노조 임원들만의 선거운동을 정치세력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기노조의 현실입니다" 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낸다.

사실 과기노조가 맺은 정치세력화의 결실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4명의 의원 중 3명은 다음 당선을 위해 민주당을 기웃거리거나 구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는가 하면, 뇌물 등 비리에 연루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지자체를 준비한다고 하니, 반발이 없을 수는 없겠다. '선거'자체에 대한 회의와 함께 '정치기금'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전자통신지부 정기현 지부장은 "정치기금을 조합비로 내는 것은 불법입니다.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조합원 1인당 5천원을 지부가 내라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요는 정치활동을 위해 조합비와는 별도로 특별기금을 적립하지 않는 이상, 1인당 5천원의 결의는 조합비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민주노총의 조합원이라면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의해 '민주노동당원'이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원만이 '노동자 후보'가 될 수 있다. '우리후보'는 조직적, 재정적 지원이 따른다. '우리후보'이기 때문에 5천원을 내야하고, 할당량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워내야 한다. 이점에서 과기노조 정치세력화의 집행과정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조합원들은 '정치적 무권리 상태'로 내몰리게 된다. 그렇게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현장에서 '또 다른 권력'으로 등장하며, 조합원들의 정치적 소외는 더욱더 심해진다.

과기노조, 모래위의 성

'민주노총 정치방침'과 그것의 권위적인 집행만의 문제라면, 당장 민주노총에 '정치방침을 바꾸라'고 항의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과기노조는 다른 노조들보다 앞서 산별노조를 건설했다. 지금의 산별건설에 비하면야 '투쟁으로 건설하는 산별'이었다. 산별노조를 먼저 건설한 것이 아니라, 각 기업별 노조를 해산하고 산별노조를 띄웠다. 정부는 '기업을 넘는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 또한 '합법화 쟁취'투쟁을 통해 무력화했다. 당시 노동운동진영에서는 과기노조의 사례를 집중 연구했고, 산별과 정치세력화의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았다. 그러나 8년간의 산별 실험은 '위기'와 '해체'로 나타나고 있다. 과기노조가 8년전 각 노조를 해산하고 단결했던 산별의 정신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세동 과기원지부장은 산별노조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는 마치 산별이 만병통치약인양 치부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과기노조 8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형식적으로만 뭉쳤을 뿐… 거대한 하나의 '연합체'일 뿐이죠. 조합원들은 산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했고, 노조간부들은 이를 지도하고 이끌어 갈만한 역량이 없었어요. 비유하자면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은 어린아이의 수준이죠." 정기현 전자통신 지부장 역시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8년동안 산별교섭 한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대중들의 동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교섭방식에만 치우쳐 공동교섭이다, 집단교섭이다 해봤지만 안됐어요. 진정한 산별이라고 하면 새로 유입되고 있는 비정규직도 끌어안아야 하는데…." 구성원은 변했는데 그것에 걸맞는 조직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위험한 시도-숫자 불리기

과기노조의 '앞선 실험'은 계속된다. 9월3일 밤, 과기노조 중앙위는 2개 지부 제명과 동시에 인문사회계 정부출연기관 노동조합인 전국연구전문노조(연전노조)와 통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양 노조 합동 중앙위원회를 열어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어 9월12일 양노조 합동중집위가 열려 12월까지 '통합노조'를 출범하고, 이를 위해 통합추진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통추위에서는 '통합 임원 선거'를 준비하게 된다. 17일 양노조 합동중앙위와 이후 대의원대회를 거쳐야 알겠지만 이미 통합은 기정사실화 된 듯하다. 한편 과기노조 자체 선거일정이 10월인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과기노조는 선거일정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장순식 과기노조 위원장은 "임기가 한달여 더 연장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통합은 임기내에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통합은 대의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 '대의'는 완전하게 동의받고 있지 못하다. 과기·연전 합동 중집위가 열리던 9월12일, 각 지부 노조사무실에는 한 장의 팩스가 동시에 들어온다. 에너지, 해양지부 등 5개지부장의 연서명으로 제출된 '입장서'는 현재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통합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다. 즉 각 지부 임단협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적 공감대없이 통합을 추진하는데 무리가 있으며, 2개지부가 제명된 상태에서 과기노조는 조직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2개지부의 제명 문제를 통합보다 먼저 해결할 것과 과기노조의 임원을 먼저 선출하고 새로운 지도부가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장순식 과기노조 위원장은 "입장서를 낸 5개지부가 끝까지 반대하면 함께 갈 수 없는 것 아닌가"라며 앞서 제명된 2개 지부와 반발하고 나선 5개지부를 도려내서라도 통합을 연내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아래로부터 '흔들흔들'하는 과기노조의 현 상황에 대해 연전노조 박용석 위원장은 "현재 과기노조는 자정기능을 상실했다고 보여진다. 누가 집행부를 맡던지 내분이 수습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산별논의를 없었던 것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면서 난색을 표명했다. 상층의 통합이 대중의 해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큰 것이 아름답다. 더 크게, 더 크게

다시 9월3일 밤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과기노조 중앙위에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고, 하나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교육이 있었다. 연전노조 박태주 지도위원이 교육강사로 초대됐으며, '큰 것이 아름답다-연전노조와 과기노조의 통합을 위하여'라는 발제문이 제출됐다. 강의의 핵심은 현재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과기노조와 연전노조가 통합해 '규모의 경제효과'를 누리자는 얘기다. 이와 함께 "이제 돈 없이는 파업도 못하는 시대"라며 산별노조는 이러한 재정의 중앙집중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산별노조에서 산별교섭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산별노조보다 산별교섭이 더 커져버렸다. 산별교섭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층차원에서의 합의를 하부단위에 강제할 수 있는 통제력"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강력한 산별교섭으로 무엇을 쟁취할 것인가? 박태주 지도위원은 조직률의 제고와 임금격차를 축소하는 노력과 더불어 "파업을 회피하기 위한 성의 있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돈"과 "교섭" 그리고 "파업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 산별노조였던가. 박태주 지도위원의 산별노조는 서구에 '맛이 간' 산별노조 그 자체다. 이것이 틀린 생각이라고 하면 박태주 지도위원에게 '당신의 생각은 틀렸소'라며 정중하게 충고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현실에 있다(늘 그렇듯이). 9월3일 밤, 과기노조가 2개 지부의 제명과 통합산별의 결정을 하는 그 자리에서 박태주 지도위원의 논리가 강의되었다는 그 현실. 그것은 최근 과기노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민주노총 정치방침의 폭력적 관철, 조직의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운영, 조직률의 하락, 과기노조 밖의 비정규직들, '구멍가게' 소산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어떤 흐름에서 드러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보여준다. 과기노조 장순식 위원장은 "박태주 지도위원이 그 날 강연하는 지를 몰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기노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이 과기노조 밖-노동운동진영 전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데 있다. (과기노조만의 문제라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제명'해버리면 될 일이다.)

그릇에 무엇을 채울까?

조직이 조직의 구성원과 호흡하지 않는 순간, 다시 말해 노동조합이 노동자와 호흡하고, 역동적인 '치고 받고 싸우기'를 멈춰버린 순간 노동조합은 노동해방의 견인차가 아닌 이익집단으로 전락하며, 노조간부는 '물 좋은 권력'이 돼버린다. '물 좋은 권력'은 사람만 바뀔 뿐 권력 그 자체가 재생산된다. 재생산된 권력으로 노조는 유지된다. 현장의 권력은 노조관료의 권력으로 대체되며, 그 순간 노동조합은 자본가의 체제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작동한다. 왜냐면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별노조는 노동자를 담는 '그릇'이며,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이다. 조합원의 역할과 임무는 정치기금을 납부하고, 조합비를 내고, 위원장에게 표 찍어주는 것이 아닌, 그릇의 내용물을 채우는데 있다. 박용석 위원장의 말대로 과기노조는 '자정기능'을 상실했다. 그것은 곧 조합원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산별노조가 만능으로 치부되고,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현실은 과기노조에 여전히 남아있는 조합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역사적인 산별 1호-과기노조호'는 바로 앞의 암초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앉아서 기도만 할 것인가? 침몰하기 전에 '좌선회'로 키를 틀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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