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한겨레신문 국제부 기자)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위한 예비교섭을 시작한 것은 일본제국 패전 6년 뒤인 1951년이었다. 그때 한국은 바로 그 전해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휩싸여 있었고 패전 뒤 불황 속을 헤매던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기사회생함으로써 '전후 경제부흥 기적'의 토대를 쌓았다. 한-일협정을 맺고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것은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1965년이었다. 그 4년 전인 1961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개발독재체제를 본격 가동하고 있었다. 1951년 한-일 국교정상화 예비교섭이 처음 시작된 곳은 도쿄 미군 점령군사령부였다. 미국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음으로 양으로 정상화 조기타결을 촉구하고 압박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1947년부터 노골화한 미국의 대소 냉전대결체제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를 거치면서 일본의 재건을 동아시아 전략의 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있던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전략의 축인 일본 재건 프로젝트의 완결판이었다. 한국은 미국이 바라던대로 대만과 함께 '불침항모' 일본의 하부 선단으로 편입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시작된 이듬해인 1990년 일본 집권 자민당의 실력자 가네마루 신 부총재와 제1야당 사회당 대표가 평양을 찾아가 조선노동당과 3당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1991년 초부터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됐다.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1990년 한국-소련이 수교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권이라는 배후지를 상실한 북한은 존망의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 2개월 전부터 체제유지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피폐해진 북한은 경제관리 개선 조처를 통한 전면적인 경제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8월30일 일본이 고이즈미 방북을 발표하기 직전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존 볼턴 국무차관이 일본을 방문했고 9월9일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으로 날아가 방북 닷새전인 12일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남북한의 전후 대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시차는 있지만 그 과정과 양태는 어딘가 몹시 닮았다. 남북한 양쪽 모두 입지가 매우 취약한 시기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거기엔 항상 미국이 개입해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에 체결된 미-일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2차대전 종결을 위한 최종절차) 전에 작성된 조약 초안에 한국은 대일 전승국의 하나로 포함돼 있었으나 일본 쪽의 강력한 요구로 미국은 한국을 전승국 명단에서 빼버렸다. 15년간의 교섭 끝에 한국이 전쟁 배상은커녕 '잘못했다, 사죄한다'는 소리 한번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재산청구권마저 포기하는 대신 독립축하금조로 유무상 5억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일본과의 과거사를 서둘러 '청산'해버리게 되는 사태의 전말은 거기서 시작됐다.
애초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북한은 2000년 10월 도쿄만 건너편 치바현 기사라즈에서 열린 국교정상화 교섭 제11차 본회담을 경계로 배상이 아니라 '보상'이라도 좋다는 쪽으로 한발 물러서더니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보상에 구애받지 않고 한-일협정 때처럼 쌍방이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이른바 '경제협력방식'으로 해도 좋다는 식으로 물밑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 "아시아제국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며 '통절한 반성'을 한다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의 담화에 준한 내용을 고이즈미 총리가 발언하는 것으로 절충한 모양이다. 그것도 한-일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정상들이 합의 발표할 공동문서에는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한-일협정 때 일본 외상이 김포공항에서 하는 수 없이 내뱉은 유감 표명 정도의 수준보다는 한걸음 전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30년간의 시차와 기왕에 조정돼온 일본 사죄표현 수준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언제나 약자가 불리한 법이다. 이것은 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남북한 통일 이전에는 본래 의미에서의 정상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명징한 사례다. 국제관계에서 호혜평등은 오직 대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한반도와 일본의 대등한 관계는 한반도가 분단된 체제하에서는 남도 북도 달성 불가능하다. 그것은 대일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중, 대미, 대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북-일 접근은 과거 양국간 접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몇 가지 상황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이즈미 방북이 곧 북-일 국교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남북한 및 한반도 주변정세 변동에 편승한 전후 일본 총리의 북한 첫 방문은 조기 국교정상화 가능성까지 포함한 양국관계 전환에 결정적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북한이 현체제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된 경제관리개선 조처가 반증한다. 북한의 경제관리개선은 그것을 위한 외부환경 조성, 특히 외부의 자금 물자 조달통로 확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북한이 체제 안보 확보 수단으로 궁극적으로 대미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몰라도 우선 일본을 우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상황에서 일본이야말로 명분과 실리면에서 당장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한국이 북-일, 북-미 접근을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주선하고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1년에 시작된 북-일 교섭이 여러차례 중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금도 일본 국내여론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인 납치의혹문제인데, 일본이 주장하는 8건 11명의 납치의혹자 가운데 3건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예컨대 이은혜나 요코다 메구미 사건 등은 모두 탈북자나 붙잡힌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것들이다. 그들의 증언은 북-일이 접근할 때마다 절묘한 시기에 터져나와 한일 두나라 여론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때마다 양국간 관계진전은 파탄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정부는 그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북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주변국들인 중국과 러시아의 사정도 크게 바뀌었고 그들은 각자의 타산 속에서 북-일 접근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오직 미국만이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미국 역시 고이즈미 방북을 일단 환영했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고이즈미가 미국으로 향한 지난 9일 "부시 대통령은 일본이 안고 있는 납치의혹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고이즈미 총리도 북-일 국교정상화가 (미국 정부가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량파괴무기 등 안보문제의 진전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의 대북 접근이 북한 및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는 범주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미리 못박고 있고 그것은 고이즈미-부시 회담에서 재확인됐다.
문제는 일본이 이 국면에서 과연 어느정도의 안보외교상의 독자노선을 추구하고 또 그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최근 부시 정권의 강경한 대외정책은 역설적으로 미국 힘의 상대적 약화, 중국의 대두 등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독점적 지위 상실에 대한 우려에서 촉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것은 일본의 독자노선 추구라는 연쇄반응을 촉발할 수밖에 없고 최근 일본내 보수우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움직임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미-일동맹체제가 한계에 봉착할 경우 동북아 정세는 일본의 장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는 그런 점에서 일본 대외정책에 하나의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의 대북 접근은 미-일동맹이라는 아직은 유효한 틀 내에서 추진되는 것이지만 일본 지배그룹의 독자적인 중장기전략도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관측이 많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