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을 가장한 닫힘, <열린채널>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에바다 투쟁 6년-해 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라는 영상 물이 있다. 별다른 개연성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아니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두 영상물 모두 방송법 제69조에 명시된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위해 사회단체가 제 작하였으며,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방영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방송공사(KBS) 시청자참여 프로그램 운영협의회"(이하 운영협의회)에 편성신청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두 작품 모두 시청자 액세스권(또는 퍼브릭 액세스권) 보장 취지에서 만들어진 운영협의회로부터 "편성불가" 결정을 통보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방송 프로그램 이름 자체가 <열린채널>인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게마저 검열 당하고 거부당한 영상물"이라는 점이 바로 <주민등록증...>과 <에바다...>의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 공통점이다.
먼저 이미 영화제와 공개 상영회를 통해 소개되고, 입 소문을 통해 호평을 받아왔던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세상의 <주민등록증...>부터 살펴보자.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주민등록증...>은 한국 사회의 철저한 국가주의적 감시와 통 제,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주민등록증 제도에 대한 새롭고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주민등록증...>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문날인과 13개의 숫자" 뒤에 꼭꼭 숨어있던 우리 안의 파시즘, 획일화된 군사주의문화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세상이 제작한 <주민등록증...>은 그 거대한 TV 브라운관의 권력을 통과하는 데 실패하였다. 열림을 강조했던, 아니 열림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운영협의회와 <열린채널>은 자신과는 다른 <주민등록증...>의 시선 앞에서 "닫힘"을 선택했다. 그리고 운영협의회는 "비속어 사용, 주민등록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 공무원 등장, 박정희 생가 장면" 등에 대한 삭제를 요구하였고, 나중에는 "제목의 순화"가 편성불가의 주된 이유라고 밝혔다.
한편 <주민등록증...>의 <열린채널> 편성불가 논란이 채 해결되기도 전, 최근 운영협의회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제작하여 편성 신청한 <에바다...>에 대해 또 다시 편성불가의 결정을 내 렸다. <열린채널> 운영주체인 운영협의회는 <에바다...> 편성불가 이유에 대해 "일부 내용이 초상권을 침해하거나 명예훼손을 범할 소지"가 있고, 특히 "방송심의규정 제11조 '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으로서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송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저촉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물론 다른 방송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열린채널> 역시 방송법 방송심의규정의 적용을 받 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에바다 사건"은 기간 다른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번 보도된 사례가 있으며, '에바다 사건'과 관련된 장애우 인권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너무 나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일부 장면에 있어 내용적 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가 우려된다면, 운영협의회는 이 문제를 제작진과의 충분한 상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린채널>은 열린 공간이므로 인권운동사랑방이 제작한 <에바다...>에 대한 다른 내용과 의견 역시 충분한 반론과 비판의 기회가 열려있다. 따라서 이번 <에바다...>에 대한 운영협의회의 편성불가 결정은 운영협의회의 이유와는 달리 퍼브릭 액세스권에 대한 운영협의회의 몰이해와 잘못된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
퍼브릭 액세스 채널과 열린 미디어
운영협의회와 <열린채널>은 법률이 명시하고 있는 퍼브릭 액세스 채널이다. 그리고 거대한 공중파 방송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기존의 공중파 방송들이 다루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사회적 입장을 담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퍼브릭 액세스 채널의 사회적 의무이자 역할이다. 따라서 운영협의회는 태생적으로 사회단체나 시민이 제 작한 프로그램을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수용하고 운영해야할 사회적 책임 이 있다. 방송국의 권력과 문턱을 겸손하게 낮추고, 시청자들의 방송접근 기회를 용이하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운영협의회의 "존재의 이유"이다.
하지만 <주민등록증...>과 <에바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운영협의회의 태도와 기능은 "퍼브릭 액세스 채널"보다는 "검열기구"에 가깝다. 기존 방송 권력과 자본의 이해에 근거하여 편성신청된 작품을 자의적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다른 방송 프로그램과 달리 유독 <열린채널> 프로그램에 대해서만 방송심의규정을 원칙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 운영협의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간 사회단체들은 <열린채널> 운영과 관련해 선정 심의 절차에 문제가 있으며, 복 잡하고 까다로운 편성 신청 절차가 시청자의 방송 접근을 어렵게 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지적해 왔다. 그리고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쳐 KBS 시청자위원회와 KBS 방송위원회에 < 열린채널> 운영 개선 의견서를 내고 운영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지금도 퍼 브릭 액세스 채널의 운영주체인 운영협의회와 KBS는 이런 사회적 요구에 대해 묵묵부답과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운영협의회와 <열린채널>의 문제점은 단순히 방송 권력내의 문제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인 터넷의 등장과 함께 가장 크게 기대되었던 부분이 바로 인터넷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특이 성에 기반한 퍼브릭 액세스 채널의 확산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비용이 "0"에 가깝고, 전지구적 공간에 걸쳐 빛의 속도로 의사표현과 피드백이 재현되고, 미디어 권력의 손길이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수많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은 가장 이상적인 퍼브릭 액세스 채널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술과 제도만으로 퍼브릭 액세스 채널과 그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운영협의회가 법률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검열장치의 기능을 다양하게 수행하듯이, 아무리 수많은 채널이 생겨도 퍼브릭 액세스 채널의 신설은 구경할 수 없듯이, 이제 인터넷 공간의 수많은 자유게시판들은 다양한 방식에 의해 필터링되고, 심지어 소리 없이 일방적으로 폐쇄되기까지 한다. 특히 사회적 공공성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정부 및 공공기관, 정작 비판적 액세스권이 강력 하게 보장돼야 할 거대 기업 및 미디어들의 사이트에서부터 이러한 액세스 채널의 기능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이미 많은 사이트들의 자유게시판이 노골적으로 폐쇄되었거나 무책임한 방치를 통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유게시판에서의 시위, 비판, 논쟁들은 다양한 필터링을 통해 기술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이제 퍼브릭 액세스 권리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진정성과 민주성이 보장될 수 있는 열린 미디어는 기술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관계와 합의 를 통해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재 / 문화연대 정책실장 redgang@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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