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사]전국노동자대회의 역사(2)

92,93 전국노동자대회 -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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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대회는 한 해 투쟁을 정점에 올리고,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적 확대를 이루어온 장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는 한층 타오른다. 94, 95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민주노총 건설을 향한 조합원들의 열기를 모아내는 과제를 담고 있었다. 민주노총 건설은 민주노조 총단결을 향해 노동자대중의 투쟁을 조직적 성과로 귀결시켜 온 노력의 결과였다. 이제, 민주노총 이전 시기의 전국노동자대회를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 한다.

ILO기본조약 비준, 노동법개정과 민주대개혁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92년 대회는 ILO공대위 차원에서 개최하였다. 서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야제는 노래와 율동 배우기, 강강술래 등 참여자 모두가 하나되는 자리였다. 다음날 '노동악법철폐'가 쓰여진 붉은 색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은 깃발을 휘날리며 여의도로 향한다. 대회준비 지도부의 방침은 깃발을 내리고 서울대에서 교통편을 이용하여 대방역까지 이동한 다음 대방역에서부터 여의도까지 '조용히' 행진하는 것이었다. 애초의 방침을 '무시'하고 신명나게 행진해 가던 노동자들은 한강고수부지에서 그들을 반기는 듯한 '민주대개혁'과 '산별노조, 민주노총 건설'이 쓰인 대형깃발을 만난다. 본대회가 열리기 전에 전국노운협, 전국노련, 가톨릭노동사목 전국협의회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동단체 대표들은 결의대회를 갖고 그 동안 각자 수행해 왔던 활동을 연대하기 위하여 평가하는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전노협과 업종회의 조합원들의 노동법개정 의지와 민주대개혁의 요구를 담은 수십 개의 서명깃발의 입장함으로써 본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는 '노동악법 개악 기도 분쇄', '자주적 단결권 완전쟁취', '민주노조 총단결', '산별노조 건설', '민중연대 민주대개혁 쟁취'등을 요구로 내걸었다. 본대회는 이러한 요구를 담은 연설과 문화상징의식으로 이어졌고, '대회 선언문' 낭독으로 마무리되었다.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가 부여받고 있던 과제

자본과 정권은 1987년의 노동자 대중운동에 대처하여 산업구조를 조정하고 대통령선거를 통한 권력 재편과정에서도 노동운동에 대해 전면적으로 공격하였다. 총액임금제를 내걸고 87년 이후 이루어온 단체협약을 개악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압살하려 하였다. 국가와 자본이 추구하는 산업구조조정은 노동자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고용불안을 야기하여 노동자의 생존을 위협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진행된 노동법 개악 시도가 노동자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갖게 하였다. 한편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포항제철, 금호타이어 등 대공장 노조의 노조대표자들은 조직적 기반의 취약성을 반영하듯 사용자에 유리한 직권조인 사태를 빚어냄으로써 그나마 조직적 역량을 집결해 가던 노조에 대한 조합원의 불신을 자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위한 투쟁방침을 천명하고 노조집행부와 조합원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노동자 총단결 계기 마련을 위해 민주노조들의 대표자들이 총집결하여 '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1,071개 노조와 47개 단체), '민주노조 총단결과 산별노조 건설'의 방향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대회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총단결가'를 부르며 연대의 절박성, 그리고 단지 87년과 같은 자발적이고 무계획적인 대중투쟁이 아니라 민주노동자 모두가 조직 차원에서 연대할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국노동자대표들은 이 점을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회장의 프로그램과 가두행진 기획에서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었다.
대회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의 투쟁을 결의하는 순서를 설정하기 어려웠고 가두행진을 정연하게 계획할 수 없었다.

87년 대투쟁의 힘으로 결성된 민주노조들이 이미 '전노협'으로의 집결을 열망했던 것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한 상황에서, 전노협 하나의 전국조직으로서는 정권과 자본가의 치밀하고 파괴적인 탄압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아주 일반적인 수준의 ILO 권고안이 지켜지는 선에서라도 노동법을 개정해야 하는 절박한 문제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92년 당시에는 모든 노동자가 전태일 노동열사의 역사적 의의를 깨닫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92년 대회에서는 '전태일열사 정신계승'을 표명하지 않았다. '전태일열사 정신계승'을 전국노동자대회의 '투쟁성'의 상징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더욱 치열한 노동운동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한편 이 당시 노동진영도 운동의 전술을 두고 엇갈리는 의견이 나타났다. 즉 '노동운동론'과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과 정권의 분할지배전략과 현장통제 정책이 상당히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노동운동 내에서는 전투적 '투쟁'보다는 타협의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91년 5월의 투쟁정국이 지자제선거를 맞아 사그러들고부터 학계와 노동운동진영 내부에서는 '노동운동위기'에 관한 논의가 불붙었다. 당시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위기적 상황'으로 진단하면서 이른바 전노협의 '전투적', '정치편향적' 운동이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이라며 '사회발전적 노동운동', '진보적 노자관계론', '신조합주의론'이 마치 합리적 선택이론처럼 나타났다. 한쪽의 이러한 논의 제기는 노동조합운동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자본과 노동의 세력관계에 왜 균열이 생기고 자본과 국가의 탄압 표적에 전노협을 놓아둔 사태에 대한 자체 성찰적 비판을 비껴 가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몇 개의 그룹으로 구획되어있는 노동운동의 각 진영은 함께 단결하는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인식하면서도 민주노동운동 전체의 역량을 모아내는데는 서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92년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조 및 명칭 설정과 대회 진행을 둘러싼 논의에 반영된 것이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며 전개된 정치적 분화 또한 거셌다. 전국연합은 '범민주진영의 정치연합'으로 선거방침을 확정하고 김대중 후보 진영으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진영은 백기완 후보 선대본으로 행보를 달리한다. 이 대선은 민주노동운동의 구성 세력이 하나의 전국적 조직으로 결집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자 단결투쟁을 집중시키는데 힘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노협조차 단일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노동자의 정책적 요구를 정치 쟁점화 한다"는 정도로 수습하였고, 전노협 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주창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실천지침으로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방침이 제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3년 민주노조진영, 전노대로 총집결하다

민주노조 진영은 90년 이후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절박한 요구를 전국노동자대회 공동개최로 일구어 내었으며 공동임투를 시도하고, ILO공대위를 결성해 보는 과정에서 전국 단일의 조직 결성을 향하여 조금씩 전진하였다. 정부와 자본은 이제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을 찾기 시작하여 그 첫 걸음으로 93년 한국노총과 경영자총연맹이 임금합의를 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과 투쟁은 전노협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으며 전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투쟁을 위한 진용을 범민주노동운동진영으로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93년 6월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산하 1,145개 노조, 40만 7천여 명 조합원)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전노대는 아직 느슨한 '공동사업 추진체' 수준이었다.

노동자들이 다시 한번 총집결을 현실화하자 '문민정부'는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근거로 전노협, 현총련, 대노협 등 전노대의 주요간부를 수배·구속하고, 파업 사업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노동부장관은 '집단적 노사관계법을 올해 안에 개정'한다고 예고했다가 각계 의견대립을 이유로 '근로자파견법만 제외한 나머지는 연내 개정 불가, 1994년 상반기 중 개정'을 발표한다. 이에 민주노조진영은 9월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하려는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저지하고, 복수노조금지 조항, 제3자개입금지 조항 삭제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을 연내 개정하도록 집중적·대중적으로 제기한다. 한편 기업별 노조의 운동한계를 넘어 조직적 결집을 도모하기 위하여 산업별노조에 기초한 전국중앙조직 건설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건설한다는 목표로 세우고 93년 노동법개정투쟁을 펼쳐나가기로 한다. 아직 튼튼하지는 않지만 전 민주노조의 힘이 연대하는 '전노대'를 세우고 노동법개정의 새로운 투쟁목포를 확인하면서 준비되는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만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과 근로자파견법 및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정 저지를 위한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

9월15일 전노대는 전국노동자대회 일정을 10월31일로 확정하지만 명칭과 대회장소는 대회 일주일 전에야 결정된다. 전노대는 대회 기조를 둘러싼 논의로 난항을 겪다가 '평화적인 집회와 가두행진을 통해 노동법개정 등의 요구를 사회여론화 시키고 투쟁의지를 과시하기로 한다'는 대회기조를 확정하고, 전야제는 고려대학교, 본대회는 효창운동장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10월30일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된 전야제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6천여 명이 참여하여 그 열기를 드높였다. 전해투 결의대회, 전국해고자 총회를 사전 행사로 진행하였다. 권영길 전노대 공동대표의 인사로 전야제가 시작되어 각 지역의 문화공연과 문화패의 공연이 이어졌다. 근로자 파견법, 공공자금관리기금법, 노동법개정에 대한 연설, 전교조, 한총련 등의 연설로 투쟁의지를 다지고 폭죽과 불사다리 넘기를 마지막으로 새벽3시경에야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다음날 아침 노동자들은 거리행진으로 본대회 장소로 이동하였다. 고려대-신설동-동대문-종각-미도파-서울역-청파로-효창운동장 순으로 행진했다. 무려 3시간 가량 걸렸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노동자의 정열한 대열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고자 한 행진은 노동자가 도시의 소외인간층이 아니고 이 땅, 이 나라의 정당하고 정상적인 구성원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사전 프로그램으로는 '단결 전노대' 노래와 율동배우기를 했다. 전노대 결성에 기대를 걸고 있는 노동자들의 몸놀림이 가벼웠다. 깃발입장으로 본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사에 이어 단병호, 이홍우 전노대 공동대표와 이소선 어머니의 인사가 있었고,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이 격려사를 했다. 대회 기조 연설, 상징의식, 대회결의문 낭독으로 대회를 마무리하고 대오는 용마로-백범로-마포로터리를 거쳐 여의도로 행진하였다. 전야제의 긴 행사와 긴 행진에 지친 대오는 국회 앞 농성투쟁을 선포하면서 마무리하였다.
그 날 오후 민주당사에는 국회앞 농성투쟁을 진행할 노조대표자들이 모였다. 111명이었다. 그러나 농성이 취소되었다. 말하자면 농성대오 구성에 대한 치밀한 사전준비와 치열한 열성이 모아지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이다. 노동조합 대표들의 모임에 대한 과학적 평가가 필요한 것이었다. 지난 8월부터 농성투쟁을 준비해온 전노협은 70여 명의 인원으로 농성을 감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대회이후의 어떤 적극적 전망을 여의도 광장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이전 전국노동자대회가 국회의 입법기간 이후에 열려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는 데 실효를 거두지 못해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터라 1993년에는 노동법개정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평소보다 2주정도 앞당겨 열었다. 그러나 대회 기조결정이 늦어지면서 조직화와 실무 준비에 어려움이 따랐다. 전노대 결성에 대한 노동자대중의 기대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년 수준의 2만여 노동자가 모이는 데 그쳤다. 장소가 너무 넓다보니 대회의 요구를 담은 현수막은 산만해 보였고 전국노동자대회를 상징하면서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걸개그림이 걸리지 않아 집중점을 찾기 어려웠다. 이렇듯 대회 준비에서 진행 과정상의 미숙함과 혼선은 전노대라는 회의구조 속에서는 결정된 사업에 대해 안정적인 집행력을 가질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대회 이후 투쟁의 파고를 정기국회 개최시기까지 이어가기 위해 계획된 국회앞 농성 취소에서도 보여진다. 민주노조 진영은 전노대라는 상설 회의체로 모여 조직적 연대를 이루었으나 내적 조직력은 아직 미숙한 상태였다. 조직력, 집행력의 부재로 문제점이 많이 지적된 93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더욱 강고한 조직력의 확보를 통해 민주노조 총단결이 이루어지는 과도적 시기의 대회였다. 민주노총의 건설이 시급한 과제였지만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음이 각성되는 것이었다.
한편 그동안 전국노동자대회는 사회 전체에 노동문제를 알리고 노동운동단체 및 민중운동진영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대회 주최구성에 노동운동단체의 적극적인 결합을 추동하였다. 그러나 93년 대회는 노동운동단체가 대회 주최단위로 결합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이로부터 한국노동운동에서 조합중심 운동이 우세하고 노동운동단체는 조합운동과는 일정한 지향성의 특색을 찾아가야 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92년과 93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민주노조운동이 전체적으로 서로 얽혀지게 하는 형태가 ILO공대위로부터 전노대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치러진 대회였다. 91년 이후 힘겨루기에서 밀리기 시작하는 노동운동 진영이 '민주노조 총단결'을 향한 연대 활동을 꾸준히 벌여온 성과였다. 그러나 조직적 토대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과도적 상태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생산직, 사무직 전문직, 대공장 등의 노동자가 자신의 조직적 틀 속에서 노동조합활동을 벌여온 경험으로부터 단일 전국적 조직력을 구축하는데는 많은 경험과 헌신적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민주노조 진영은 자본과 정권의 분할전략에 대항해 싸우며 연대 활동을 계속해왔고, 매년 전국노동자대회를 기점으로 한발 한발 민주노조 총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전진을 계속해 왔다. 92, 93년 노동자대회는 대중적인 폭발적 투쟁성을 확보해 주는 대회는 아니었으나 94년과 95년 민주노총 건설을 향한 노동자들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데 다리가 되어 준 대회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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