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와 남은 자들 21]"너희 가슴이 내 가슴 같겠구나"

천세용 열사의 아버지 천영웅씨

문선영 ahimsa@kdlpnews.org
“성남 시청 몇 번째 골목길에서 우측으로 돌아서 좌측으로 돌아 몇 층 건물에서…” 여의도에서 성남까지 1시간 30여분의 버스를 타고, 내리고서 들은 알 수 없는 길찾기.

지친 심정에 “시청 앞으로 나와 주시면 안될까요”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성남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집 그러면 다 아는데”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그리고선 지나가는 행인 한 사람 붙잡아 물으니 너무나 쉽다는 듯 성큼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렇게 찾은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외진 골목 끝자락 교회 지하 1층 어두컴컴한 복도 한켠에서 중국말과 서툰 한국말 그리고 전화 상담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온다. 복도 양쪽 벽에는 중국어, 아랍어, 영어로 된 게시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중국 스리랑카 방콕 이란 네팔 등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숙소와 식당, 그리고 작은 예배장소까지 지하층에 옹기종기 들어차 있다.

그 가운데 천세용 열사의 아버지 천영웅(60·사진)씨가 외국인 노동자 상담을 하고 있다. 보수도 없고, 그저 영수증이 꼭 필요한 활동비만 받으면서 활동을 해온 지 벌써 5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 ‘열사의 아버지가 어떻게 외국인 노동자 운동에 뛰어들게 됐을까’.

천세용(당시 20세)은 1991년 5월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 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해 현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아들의 죽음은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었지. 그동안 학습지 대리점도 해보고 생활에 쫓기면서 살았는데 아들이 죽자 내가 뭔가를 소유한다, 가지려 한다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어. 아들은 뭔가를 위해 목숨까지 송두리째 버렸는데 나는 가진 게, 가질려고 하는 게 너무 많았어. 불면증으로 밤을 꼬박 세운 게 한 두 해가 아니었지.”

아들의 죽음이 그를 반추하는 ‘거울’이 된 것일까. 그는 김혜승 목사를
만나게 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접하게 됐다.

“먼 타국 땅에서 핏줄 하나 없는 한국에 와서 다치고, 임금 떼이고, 구박받는 그들에게 절망의 표정을 보면서 ‘네 가슴이 내 가슴과 같구나’ 싶었지. 나도 황량한 벌판에 잡을 것 하나 없는 채로 서 있는데 그들도 나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더라구. 그래서 여의도에서 천막농성도 접고 성남으로 달려와서 시작한 게 5년이 됐지. 돈을 벌고 한국 땅을 떠나며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돌아간 그들이 설이나 추석이 되면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전화라도 올 때면 고맙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상담을 기다리는 이들이 줄을 선다. 기다리는 눈들이 불편해 잠깐 자리를 양보한다. “남편이 네팔사람인데 한국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사장이 밀린 월급을 안줘요” “손가락이 잘렸는데 의료보험도 안되고, 사장도 치료비 안줘요” 등등….

이곳에 하루 들어오는 상담은 20~30여건. 임금체불과 산업재해에 대한 상담업무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병원방문, 장례식 처리를 비롯해 밀린 임금과 재해 보상비를 받아내기 위해 공장까지 쫓아가 사장들과 싸우는 일도 일상이다. 법정 대리인으로 서서 싸워서라도 합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한 칸이 임금체불, 사기 국제결혼, 국적회복, 출국, 산업재해, 폭행 의료관련 문서 박스로 가득하다. 저 종잇장 속에 눈물이 들어있겠지.

그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전문교육을 정규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 그저 관심과 열의로 그들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한다는 마음이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주 노동자 운동을 하면서 그도 자신의 ‘진보’에 자부한다며 건네는 한마디가 남는다.

“민주주의, 민족, 국가가 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는 것도 진보라구.”
[ 106호] 10.7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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