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연/편집위원ㆍ변호사
새천년민주당과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가칭 개혁적 국민정당이 창당 이후 당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정치적 기본노선을 밝히는 강령(안)을 발표했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는 느낌이겠지만 발표된 강령(안)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이것만 보아서는 이 정당이 그 지향하는 바가 기존의 다른 정당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실체가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강령이란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또 기존 정당들 중에는 강령을 실천할 의지도 없으면서 일단 좋은 표현들만 골라 포장해놓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적 국민정당은 자신이 발표한 강령을 실천할 의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강령에 대한 문리해석의 범위를 넘어 목적론적 해석을 시도해보아도 그들이 지향한다고 표명한 가치는 결코 기존 민주당의 그것을 넘어서는 부분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민주당의 강령과 노무현 후보가 추구하는 정책을 개혁적 국민정당이 지향하는 강령과 한번 비교해 보라. 또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한가도 한번 검증해 보라. 필자가 보기에 유의미한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면 지향하는 가치도 비슷한데 왜 당을 따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결국 향후 통합을 염두에 둔 일시적인 전술이거나 아니면 현재 민주당의 이미지가 추락한 상태이니 강령상 동일한 가치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일단 이름이 다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지금 명칭이 다른 당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둘은 합쳐질 운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민주당이 개혁적 국민정당을 흡수하건 반대로 개혁적 국민정당이 민주당을 흡수하건 그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은 민주노동당과는 다른 한 몸이 될 운명이란 것만이 유의미한 것이다.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은 헌 술을 새 부대에 담는 행위이다.
한국사회는 그 경제적 토대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대중의 의식에 있어서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과 관행이 남아있는 사회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세계의 부자나라클럽으로 불리는 OECD에 가입하고 있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우리의 의식과 관행, 제도와 그 제도의 운영능력, 현재까지 우리가 설계하고 발전시켜온 모든 분야, 모든 조직의 운영시스템이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노동과 자본의 이해대립을 기본으로 하여 조직되고 운영되고 있는 상당히 발전된 자본주의사회라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GDP나 무역규모가 이미 세계 10위권을 넘볼 정도의 상당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이며, 외국인 노동자만도 수십만명이 유입돼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향후 수십년 또는 그 이상을 내다보는 유구한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경우 이러한 노동과 자본 사이의 이해관계를 그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않는 정치노선과 강령이란 결코 진보와 개혁을 담보할 수 없다.
개혁적 국민정당 강령(안)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혁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강령(안)에 따르면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 누군가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에 의해 배려되어야 할 노동3권의 보장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노동3권만 보장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개혁’되지는 않는다. 노동자를 개혁의 주체로 설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들에 관한 중대한 개혁조치들은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이해관계가 투명하게 밝혀지고, 그 상반된 이해관계의 득실이 냉철하게 계산될 수 있는 상황이 돼야 하고, 그로부터 노동자가 법과 제도를 설정하고 운영하는 국가권력의 다수지분을 차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자원배분을 둘러싼 자본과의 협상에 있어 주도권을 잡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는 결코 중대한 개혁을 이룰 수 없다.
정치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다면 노동자는 당연히 계급으로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단지 인권보장의 차원에서 노동3권이 보장돼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축적해온 부를 합리적으로 재분배하고, 거시경제적으로는 수출위주의 고도성장이 아닌 내수위주의 안정적 성장을 추진하며, 빈부격차를 해소시키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기회균등을 보장하며 평등한 의료와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등 다양한 사회보장시스템을 마련하고, 자본에 대한 강력한 조세정책을 통해 그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여 운영하는 등의 일이나, 금융자본이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흐름 속에서 삶의 안정성과 직결된 직장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을 실현하며, 공기업과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지켜내는 일, 또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민간대기업을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시켜 경제민주화를 이룩하는 것과 같은 일들은 대부분 노동자를 주체로 추진되는 강력한 개혁이 아니라면 달성되기 어려운 일들이다.
우리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중대한 개혁조치들은 결국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코 추진될 수 없다. 노동자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를 배제한 상태로 추진됐던 김대중 정부의 지난 5년간의 개혁정책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개혁적 국민정당은 그러한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사회의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보수정당이 탄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 106호] 10.7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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