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면적이 넓고 1억 7천만명의 인구를 가진 남미대륙의 최대국가 브라질에서 사상 최초로 노동자 대통령이 탄생되었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57세). 우리에겐 ‘룰라’란 약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금속노동자 출신의 그가 노동자당(PT) 후보로 네번째 출마한 이번 대선에서 8천 3백만명이 참여한 결선투표에 유효투표의 61%를 획득함으로써 당선을 확정지은 것이다.
국제투기자본의 노골적인 낙선 작전
70년대 말 전투적인 대중파업의 물결 속에 브라질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나선 룰라는 1980년 노동자당을 창당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물꼬를 텄다.
룰라는 89년 ‘사회주의 브라질’을 기치로 대선에 처음 출마해 44%, 3천 1백만표를 얻어 집권 가능성을 열었으나, 94년과 98년 대선에서 연거푸 쓴잔을 마셨다. 자본가들이 정파를 초월한 연합작전을 펼치며 노동자 대통령의 등장을 봉쇄한 까닭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자본가 계급의 ‘룰라 낙선 연합작전’은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룰라가 부동의 1위를 고수하자 이번에는 연합작전의 범위가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5월초 미국 출신 국제투기자본의 공격이 포문을 열었다. 미국의 거대 금융기업 메릴린치와 모건 스탠리는 ‘룰라의 당선가능성’을 이유로 브라질 채권을 평가절하했다. 이로 인해 브라질 주식시장은 하루만에 4% 이상 하락했다.
6월초에는 국제투기꾼의 대명사 조지 소로스가 “노동자당 룰라 후보가 당선되면 투자자들이 브라질에 대한 투자를 중단할 것”이라며, “브라질 경제가 살기 위해서는 룰라가 당선되면 안된다”며 협박했다.
국제투기자본이 잇따라 협박을 해대자 브라질은 환율·채권값·증시가 일제히 폭락하며 금융시장이 불안에 빠졌다.
그러자 전 IMF 총재 스탠리 피셔는 “룰라가 승리할 경우 그는 지금의 경제 정책과 반대노선을 밟을 것이고 투자자들은 이를 우려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브라질의 금융위기는) 경제 문제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정치에서 야기된 문제”라며 공세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그런 가운데 집권 사민당의 대선후보 조제 세하는 “나를 찍을 것인가, 아르헨티나가 될 것인가”라며 룰라 지지는 곧 해외투기자본의 철수를 불러와 브라질 경제를 아르헨티나처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희망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룰라가 선거 승리 직후 당원과 지지자들 앞에서 꺼낸 첫마디이다. IMF와 미국, 국제투기자본들은 그의 당선이 야기할 ‘두려움’을 확산시키려 갖은 협박을 일삼았지만 브라질 민중들은 룰라를 ‘희망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노동자당은 이번 선거에서 △조세·토지개혁 △4년 내 실업률 반감 △고용창출 △빈곤층 구제를 위한 주택건립과 기초생활보조제도 △공공의료·공교육·사회교육 강화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또한 룰라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전미자유무역협정(FTAA)’에 반대한다는 선언과 함께 미국의 세계패권에 맞서 남미 경제공동체(Mercosur)를 결성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층 대중운동조직과 함께 브라질 노동자당은 지난 9월에 전미자유무역협정 국민찬반투표를 조직했는데 이 투표에는 무려 1천만명이 참여해 85%가 반대표를 던졌다.
빈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미국 대통령 부시의 ‘악(惡)의 축’ 발언에 맞서 ‘선(善)의 축’을 결성하자고 룰라 당선자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물론 룰라는 선거 승리를 위해 기존 노선을 온건하게 바꾸고 과감하게 중도파 및 우파와 손을 잡는 등 좌파에서 이탈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노동자당의 선거 승리에는 단지 타 세력과의 합작이라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승리의 밑바탕에는 노동자당을 비롯해 브라질 민중운동이 벌여온 대중투쟁의 성과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 알레그레 참여예산제
브라질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리오그란데 두 술 주의 주도인 포르투 알레그레 시는 노동자당이 1988년부터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연속 집권하며 참여예산제라는 독특한 실험을 성공시켜 왔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평의회가 시 예산의 배분기준과 공공사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울산노동자신문 49호 7면 참조)
이 제도의 도입 이후 수만명의 주민들이 직접 평의회의 회의에 참석하여 시 예산을 결정함으로써 다른 도시라면 고급주택이나 사무용 건물, 고급쇼핑몰처럼 자본가의 이윤 늘리기에나 쓰일 예산들이 빈민용 주택이나 서민의료기관 및 교육기관 등 사회보장 분야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건·교육·복지 부문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포르투 알레그레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 쾌적하고 부유하며 활력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다.
브라질 민중들은 무엇보다 포르투 알레그레를 비롯해 노동자당이 집권한 지방의 성과에 신뢰를 보낸 것이다.
포르투 알레그레는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사회진보를 위해 활동하는 5만여명의 활동가들이 모이는 ‘세계사회포럼’을 올해 1월에 2회째 개최하기도 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룰라 낙선을 위해 세계투기자본이 연합하는 것에 맞서 포르투 알레그레를 진보정치·노동자정치의 ‘성지’이자 ‘연대의 상징’으로 만들며 세계 진보운동의 눈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당시 세계사회포럼은 룰라의 승리를 예견이라도 하듯 이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땅없는 농촌 노동자들의 운동
0.8%의 대토지소유자들이 브라질 농토의 43%를 독점하는 등 브라질 토지소유의 불평등 문제는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더 이상 합법적인 토지개혁을 기대할 수 없고 힘들여 개간한 땅마저 빼앗기는 현실 앞에서 1970년대부터 브라질의 땅없는 농촌노동자들은 대토지소유자들이 개간하지 않는 황무지를 무단 점거하여 정착하고 경작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이 투쟁의 성과로 85년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브라질 ‘땅없는 농촌노동자들의 운동’(MST)이다. (울산노동자신문 48호 7면 참조)
MST 운동은 빈농들이 벌이는 생존권 투쟁의 수준을 넘어서서 공동경작지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의사결정은 집단토론과 민주적 과정을 거치며 도시 노동자와의 연대를 실현하고 협동조합적 생산관계를 발전시켜 자본주의 질서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대안사회를 제시하는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이 10여년 이상 선거 대응에 활동의 초점을 맞추면서 창당 초기의 전투적인 모습을 탈피해가고 특히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서 간혹 철저하지 못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자, 활력있게 대중투쟁을 전개하는 MST로 투쟁하는 대중들이 점차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MST는 이제 전국에 50만명의 회원과 250여개의 촌락공동체를 보유한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노동자당 기층조직 일부가 MST와 활발한 연대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98년 선거에서 리오그란데 두술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노동자당은 MST 출신 활동가를 농업장관으로 입각시켜 MST와 함께 유전자조작 농산물 반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당 지도부는 MST와 ‘비공식적인’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불가피한 타협인가, 노동자당의 우경화인가
그런데 40%를 오르내리는 득표에도 세 번이나 낙선한 룰라에게 대통령 당선은 너무나도 목마른 것이었던가.
그는 이번 대선에서 브라질 자유당의 섬유자본가 출신 조세 알렌카를 부통령 후보로 앉혔다. 또한 룰라는 브라질 전 대통령이며 우파 정치인인 주제 사르네이에게 외무장관직을 제안하며 군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노력하겠다고 약속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룰라는 집권당 후보인 세하와도 연합할 수 있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대권을 둘러싼 ‘합종연횡’이라 불릴만한 이런 합작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노동자당이었다. 당 내부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고 89년 대선 강령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룰라는 “그 강령으로 자네가 출마하게, 만일 자네가 1차 투표를 통과한다면 결선에서 내가 자네를 밀어주지”라고 일축했다. 당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민영화된 기업을 다시 공기업으로 바꾸고 불합리한 해외채무에 ‘채무불이행’ 선언을 하겠다던 지난 선거까지의 공약은 이번 선거에서 외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룰라는 선거 막바지에 IMF와의 협약 준수를 약속하며, 기존 노동자당의 ‘IMF와의 재협상’이라는 태도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투적인 MST 운동과의 ‘비공식’ 동맹도 부담스러웠던지 1차투표 직후 룰라는 MST 측에 “과격한 행동을 삼가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룰라의 변신 때문이었는지 대선 직전 브라질 자본가단체 가운데 하나인 CIVES(중소기업가들 중심, 회원 150여명 규모)가 공식적으로 룰라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자당의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룰라 후보가 경제부흥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현실을 빗대 당내에서는 이번 선거가 ‘노동 대 자본’이 아니라 ‘투기자본 대 비투기자본’의 구도로 치러진다는 성토가 있기도 했다.
미래는 꿈꾸고 실천하는 자의 것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가 우경화하고 있다는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룰라의 당선을 그저 중도파와 우파를 끌어들인 결과로만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선거 승리의 바탕에는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가 어느 곳보다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남미대륙의 현실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해 온 브라질 대중운동의 성과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포르투 알레그레 참여예산제처럼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민중적 질서를 창출해 내려는 당 내부의 투쟁, MST처럼 대안사회 체제를 자신의 촌락공동체에서 실현해 내려는 당 외부의 투쟁,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세계 진보운동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투쟁의 성과가 룰라의 당선으로 이어진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MST 전국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스테딜레가 선거 직후에 한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당은 좌파가 아니라 중도파의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나는 룰라의 승리가 그간 탈정치화 되어온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상이 왔다는 점을 발견하고 스스로 일어서도록 만드는 상징이 될 것임을 믿는다. 또한 룰라의 승리는 지난 10여년 동안 후퇴해 온 브라질 대중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룰라의 당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브라질의 대중운동이 새롭게 폭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로 파탄지경에 이른 남미대륙의 한복판에서 브라질 민중은 과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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