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자대회의 역사(4) 88-89년 전국노동자대회

정경원(노동운동역사자료실)

'전국노동자대회' 하면 그 어느 해보다도 88년과 89년 대회가 떠오른다. 88년대회는 '서울의 도심지 한복판을 물결쳤던 노동자군단'의 모습으로, 89년 대회는 '빨치산같이' 한밤중에 산을 넘어 대회를 사수하면서 전노협 건설의 의지를 불태웠던 날로 기억된다. 두 대회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대중 스스로 만들었고, 노동자의 요구를 명확히 내세웠던 대회였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의 자주적 민주적 투쟁의 시작, 1988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기반하여 무수한 민주노조를 새롭게 결성하고 기존 노조를 민주화시켰으며, 지역수준에서 노조의 연대조직을 이루어 내었다. 87년 12월 처음으로 마창노련이 결성된 후 서울, 인천, 성남, 전북, 진주, 부산에서 지역노조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인쇄공노조와 제화공노조 등 '지역노조'와 사무금융·연구전문기술·출판 등 업종별노조협의회가 속속 결성되었다. 이와 별도로 특정 과제를 연계해서 투쟁하기 위해 노동운동단체(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88.6.7. 결성), 특위 및 대책위(노동법 개정 요구, 부당해고, 위장폐업 공동대책위 등)를 구성하였다. 이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대중적이지만 개인적 혹은 단위노조 수준에서 터져 나온 것을 차츰 운동진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야만적인 노동조건을 개혁하는데 초미의 과제인 노동법개정을 투쟁의 핵심으로 삼아 엄청난 파고를 그리며 확산되었다. 그 파고의 정점은 11월13일 5만여 명의 노동자가 모인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이 땅 노동자들의 진짜배기 모습을 과시했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일찍이 그 누가 노동자들의 이 엄청난 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라, 저 끝없이 출렁이는 노동자의 물결을!

11월12일 서울 신촌에 있는 연세대에 저무는 해를 등지고 노동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전국투본이 주최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전야제는 저녁 8시부터 시작하여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 웅변대회, 노조탄압분쇄 및 노동악법개정투쟁 전국선봉대 발대식 그리고 악덕자본과 정권을 형상화시킨 것에 대한 화형식으로 이어지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이 해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18주기를 맞아 전태일 노동상이 제정되었다. 제1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는 현대엔진 전 노조위원장 권용목 동지가 옥중 수상했다. 노동상 상패는 팔목을 휘감은 줄을 끊어버리는 투박한 팔뚝의 형상이다. "팔뚝은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곧은 목지의 팔뚝입니다. 곧은 목지는 주인의 폭압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노비였는데, 잘못된 세상 때문에 병신이 된 억울한 사람들을 모두 모아 썩은 세상을 갈아엎고 해방의 세상을 건설하자고 했습니다. …… 따라서 이 팔뚝은 이 시대 노동자의 해방을 향해 앞장서서 투쟁하는 팔뚝입니다." 사회자의 설명에 이어 등단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말씀은 노동자들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3권 보장하라! 한다고 누가 보장해 줍니까? 야당이 노동3권 보장하지 못해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보장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짜 위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다음 날 11월13일 12시경부터 연세대 앞은 노동자의 발길로 가득했다. 연세대 노천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감격! 5만여 노동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어깨들에서 자신의 힘을 느꼈다. 민중의례와 대회 경과보고, 전국교사협의회(87.9.27. 창립) 투쟁보고, 투쟁선언, 지지연설에 이어 선봉대 결의로 이어지는 대회 내내 노동자들은 목이 터져라 "계승하자 열사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를 외쳐댔다. 두 팔을 치켜올리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노래,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노동노래를 처음으로 대중적인 모임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전태일 추모가', '파업가', '동지가', '광주출정가'의 울림은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고 힘찼다. 선봉대 선서 후 선봉대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나와서 흰 광목천에 '노동해방'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숙연했던 분위기, 피로 쓴 '노동해방'을 단상 앞에 들고 다함께 노동해방을 외쳤다. 노동자의 단결, 연대, 투쟁. 바로 이것이 노동해방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행진을 시작했다. 의장단과 선봉대를 선두로 하여 '노동법을 개정하자', '전·이(전두환/이순자)를 구속하자'. '군부독재 타도하자', '전경련을 해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마지막 빛을 받으며 노동자들은 어깨를 걸고, 손뼉을 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연도의 시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또한 투쟁의 결의를 모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행진을 계속했다. 신촌을 지나 한강다리를 건너는 대오는 깃발의 물결을 이루었다. 선두가 거의 여의도에 다다랐을 무렵 전경이 최루탄 몇 발을 터뜨렸으나 무리 없이 광장을 지나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하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법개정 촉구대회'를 가졌다. "왔다갔다 노동정책, 야3당은 자폭하라!", "전경련을 비호하는 민정당은 자폭하라!"고 외치며, "노동법 개정투쟁은 노동자의 손으로 해내야 한다. 꼭 우리 손으로 해내자!"는 결의를 다졌다. 독점재벌 규탄 연설과 만세삼창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하루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우리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말도 못하고 힘도 없어서 이런 집회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는 한 노조위원장의 말은 그 날 참석자들의 감격을 대변해주었다.

노동자들의 진출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합법 집회 개최, 5만 노동자의 행진은 수많은 노동자가 탄압을 뚫고 피를 흘려 쟁취한 대가였다. 많은 사람들은 1988년을 올림픽이 개최된 '평화의 해'로 기억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간악한 '올림픽 평화공세'였다. 정부는 8.17 평화의 법을 선포하고, 평화구역내 집회와 시위를 한정한다는 명분으로 경찰이 노동운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노동자들의 연대집회를 막았다. 올림픽 개최의 기회를 틈타서 자본가들은 협상의 지연과 거부, 위장폐업, 직장폐쇄를 일삼았다. 세창, 녹십자병원, 우리데이타, 신애전자, 벽림상사, C.P.I, 텔레비디오 등의 노조가 탄압을 받았고 삼호정음, 한국데코레코, 부천대호전자 등의 노조 파업이 장기화되었다. 신애전자 노조는 한국노총과 협력하여 민주노조를 깨려는 자본의 공작에 맞서 싸웠다. 88년에는 구사대 폭력이 판을 쳤다. 대한광학 노동자들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구사대 폭력에 맞서야 했고, 동일전자통신 노조는 고용된 깡패들과 맞서 노조를 사수코자 투쟁하였다. 노동법개정 논의가 불거져 나오자 거대자본가들의 집합체인 전경련은 "경영권 보호를 위해 복수노조 설립 및 제3자개입 등을 허용하는 노동법개정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법 운영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고, 그동안의 개정에서 근로자의 요구가 수렴됐다"고 주장하였다.

탄압에 맞서 연대조직 건설을 시작하다

노동자들은 노동법개정투쟁과 그 투쟁을 통한 연대조직 건설로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뚫었다. 노동자들은 노동법개정을 대중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 구성된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야3당을 중심으로 노동관계법 개정 몸짓을 보였다.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의 진출을 막으려 했고 그 도화선이 될 노동법개정 대치선에서 한 발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노동법개정을 둘러싼 대립은 당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치전선이었다. 노동자들은 왜 노동법개정투쟁을 전개하였는가? 한 예로, 노동조합법 제3조 5호 복수노조금지 조항은 사용자가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는데 이용하는 무기였다. 포항제철 협력업체들의 노조결성 봉쇄, 삼성·현대·대우 등 대공장 노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어용노조를 만들어 자주적인 민주노조의 설립을 원천봉쇄 하였다. 또한 고려피혁, 동아건설 창동공장 등에서 악용된 것과 같이 기업이 본사 노조를 어용노조로 장악하여 단위사업장의 민주노조 결성을 봉쇄하거나 어용노조의 지원을 받는 지부노조를 만드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노동운동진영 내에서는 복수노조금지조항을 둘러싸고 '복수노조인정론(제2노총 결성)'과 '단일노조 주장론(노총민주화)'이 나와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주적 민주적 조직 결성을 선택하였다. 한국노총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부름에 고작 민정당과 전경련의 견해에 대해 반박 성명 발표로 답하지 않았던가?
노동자들은 노동법이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고 있음을 몸으로 알았다. 노동법을 노동자의 법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의 절실한 과제였다. 노동자계급의 연대투쟁의 발전은 연대조직의 결성과 확대 강화로 구체화되었다. 노동법개정투쟁은 3월 현대엔진탄압저지 공동대책위 산하에 특별위원회를 두면서 시작되었다. 6월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대표자회의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6/13)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의 '노동법개정특별위원회'(6/7)가 구성되어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하였으며, 두 차례의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로 7월28일에는 마침내 노동자가 만든 '개정 노동법 통일안'을 발간하였으며, 야3당 공청회를 개최하도록 강제하여 노동법개정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10월9일 북한산, 화왕산, 대둔산에서 전개된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 등반대회에는 전국에서 1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날부터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며 서명 인원이 10만 명을 돌파하였다. 10월30일을 전후로 각 지역에서 집회 및 웅변대회가 열렸다. 11월2일부터 4일까지 서노협 등 민주노조 위원장들이 평민당사에서 단식농성을 벌였고, 단식농성을 마치면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고, 전경련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대회의 성과는 조직의 건설로 귀결되었다. 11월12일 밤 대회에 참가한 전국의 노조대표자 1백여 명은 회의를 갖고 "노동법개정과 같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전국조직이 있어야 한다. 상시적인 전국연락체계라도 갖추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각 지역-업종 노조협의회대표자 2명씩이 참석하는 정례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22-23일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처음으로 열렸고 이로써 전노협 건설이 시작되었다.
11월13일 노동법개정투쟁의 대결전일을 앞두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투쟁의 열기를 높여"갔으며 이렇게 쟁취하고 조직 건설의 결과를 낳은 전국노동자대회는 한국 민주노동자의 투쟁의 장, 축제의 장이 된 것이다.

투쟁으로 사수한 1989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철폐와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88년 대회와는 달리 89년의 대회는 순탄하지 않았다. 노태우정권은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노동운동을 강도 높게 탄압하였다. 1월2일 풍산금속 안강공장 노조에 경찰이 들이닥친 이후 쟁의 현장마다 침탈하여 무자비하게 쟁의를 짓밟아버렸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식칼테러로 대들기도 하였다. 노동자가 부르짖었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거꾸로 바꾸어 경총은 파업해서 일하지 않는 자에게 임금을 줄 수 없다고 하여 '무노동무임금론'을 주창하고 노조 상근자를 압박하였다. 경찰은 노조사무실 압수수색과 같은 도발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87-88년 노동자들의 질주에 놀란 정부와 자본가는 틈새를 주지 않고 집중적으로 노동운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진영은 '전노협 건설'이라는 절박한 조직적 과제를 중심으로 싸워 나갔다. 이렇게 하여 89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벌리는 한판 힘겨루기의 장이었다.

관악산 산길을 타고 본대회를 사수하다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 주최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는 경찰이 초반부터 '원천봉쇄'를 강행하였다. 회사에서는 관리자들이, 터미널과 고속도로 곳곳에서 전경들이, 대회장에는 백골단이 겹겹이 둘러쌌다. 그러나 1만여 노동자들이 서울에 모여들었다. 서울대에는 야밤에 관악산을 타고 들어 온 노동자가 무려 4천여 명이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투쟁이 이어졌다.
노동자는 동국대에서 열린 전야제에 참여하는 것부터가 한판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경찰의 연행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담벼락을 타넘었다. 1천여 노동자들은 전야제를 치르고 다음 날 다시 서울대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들도 5시간 이상 동안 아슬아슬하게 관악산 산길을 걸어 마침내 서울대 진입에 성공하고, 서울대 본대회를 성사시켰다.
전노협 건설 깃발 입장과 함께 노동자들의 소개와 환영으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날의 대회사는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상급조직일 수 없다"는 점을 공언하였고 노동자들은 "전노협 건설을 투쟁으로 반드시 쟁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연대사와 다국적기업대책특위의 성명서, 마창노련의 11월 연대총파업 투쟁 경과보고, 투쟁결의문 낭독을 끝으로 본대회를 마치고 노동자들은 대오를 이루어 정문을 향해 진군했다. 경찰이 쏜 '지랄탄'이 하늘을 뒤엎는 가운데 정문을 사이에 두고 3시간 넘게 싸움이 계속되었다.
한편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남대문, 동국대, 동대문 등지에서 치열한 규탄시위를 벌였다. "모이자!" 소리가 나기 무섭게 "악법철폐!", "건설, 전노협", "타도, 노태우!" 구호소리가 터져 나와 도심을 휘감았다. 지랄탄과 백골단에 쫓겨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날 연행자는 1,580명을 넘어섰고, 2명이 구속되고 30여 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89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이 날을 '투쟁의 날'로 기억한다. 대회 참여를 위한 출발부터 각 지역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루 종일 경찰 병력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대회가 끝난 다음에도 전국회의 중앙집행위원과 전국 단위노조 대표자 90여 명은 전국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여 11월15일부터 사흘 간 평민당 중앙당사에서 점거농성투쟁을 벌였다.

89년 전국노동자대회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대회장에서 노동자들은 "전노협 건설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를 연신 외쳐댔다. 간부들과 열성적인 조합원들의 가슴은 '전노협을 실질적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바람과 요구로 가득 차 있었다.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해방을 이루기 위한 민중연대 전선의 구축이라는 전망을 세우면서, 전노협 건설이라는 대회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대중적 요구를 확인하였다. 대중의 요구와 대회의 목표가 하나로 통일되었을 때 대회는 '투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태일 열사를 계승하는 전국노동자대회, 그 투쟁의 자리

전태일 열사의 산화는 노동자 스스로 투쟁의 주체로 서서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을 사수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전국노동자대회 하나를 열기 위해서도 투쟁만이 자신의 무기임을 안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가두투쟁과 연좌농성 등으로 대응하였다. 노동자들은 전체 민중이 함께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노동운동과 민중운동권의 연대투쟁의 중요한 출발점을 만들어 나갔다. 1988년 첫 노동자대회 결과로서 12월에는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라는 조직을 낳았고 이후 노동자대회는 전국 노동자들이 조직적 총 결집을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장으로서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전국노동자대회가 대중 투쟁의 형식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은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곳곳에 숨어서 전태일을 기념했다. 공단 거리에서 대회를 투쟁으로 진행했다. 열사 정신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87년 7-8월 투쟁으로 솟아나는 민주노조와 대중적 진출에 근거해 각 지역에서는 '전태일 정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의 강연회, 문화제 등을 개최하곤 했다. 당시 지역 민주노조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의식을 형성하고 각 지노협을 건설해 가는데 '전태일 의식'은 노동자들에게 살아 있는 활력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권리와 조직을 향한 전태일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아 투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15년 전통의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가? 노동운동진영은 전국노동자대회를 분기점으로 삼아 투쟁 총화, 조직 확대를 이루어왔다. 자본과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투쟁으로 돌파해내면서, 공동투쟁의 내용을 담아 낸 것이었으며 계급간 연대투쟁을 통해 또 연대투쟁 속에서 발전해 왔던 것이다. 그 정점에 전국노동자대회 투쟁이 있었다. 2002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대회의 역사가 지녀온 이런 전통을 복원하여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함성, 민중연대의 함성으로 물결쳐야 마땅하지 않겠는가.(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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