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과 식민지 조선 민족해방운동

전명혁(역사학연구소 연구원)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착취하는 것이 종식되는 것에 비례하여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착취하는 것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부에서 계급 간의 적대가 사라짐에 따라 한 민족의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도 사라질 것이다." - 칼 맑스 -

1919년 3월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전민족적·혁명적 항일봉기인 3·1 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 우리는 흔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거론한다. 그러나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민족자결권테제'는 이에 앞서 식민지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은 1차대전의 종결에 쐐기를 박았고 혁명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적 무기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러시아혁명과 3.1 운동

러시아혁명은 오래 동안 짜리즘체제 하에서 억눌려왔던 노동자, 농민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수립했으며 또한 짜리즘체제 하의 제민족의 해방을 선포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크다.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오던 아시아 등 제3세계 민족들에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집합체로부터 국가적으로 분리하고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할 권리"인 '민족자결권'을 지지함으로써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불을 지폈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적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은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한 일제의 폭력과 식민지적 수탈 속에서 신음하다가 마침내 3 1운동으로 폭발하였다. 1919년 3·1 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일대기를 그린 {아리랑}은 3·1운동 당시 김산의 역사적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나로서는 처음으로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하루종일 거리를 뛰어다녔고 아무 시위에나 가담하여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 나는 힘의 의미와 무저항의 공허함을 깨달았다. ... 전국에서 도합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재산도, 농삿일도, 일신상의 안전도 애국열의 물결 속에서 모조리 잊어버렸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특이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3 1운동에는 러시아혁명의 영향력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3·1 운동 직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에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러시아는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상에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이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따른 세계사의 새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3·1 운동 직후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에서 "정의·인도, 즉 평화의 신은 독일 인민들의 손을 빌어 세계의 군국주의를 타파함이니, 곧 전쟁 중의 독일혁명이 이것이다. 독일혁명은 사회당의 손에서 일어난 즉, 그 유래가 오래되고 또한 러시아의 자극을 받은 바 있나니…"라고 하여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1918년 독일혁명의 의의를 언급하고 있다.
박은식은 1920년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다음과 같이 러시아혁명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를 서술하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은 서두에 적기를 내걸과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하였다. 과거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개조의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

러시아혁명과 민족주의의 분화,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

러시아혁명과 3 1운동을 경험하면서 식민지 민중들은 이제 민족주의의 무기력함과 사상적 공허함을 뿌리깊게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국내의 신문, 잡지 등에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혁명정부, 유물사관, 레닌의 생애에 관한 글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하에서 러시아혁명의 사상인 사회주의사상이 소개되고 일부 지식인들은 이들을 민족해방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었다.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무려 73회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 하에 동아일보는 그의 일생, 활동, 볼세비키 혁명 등을 연재하였다.
사회주의사상의 형성·발전과정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성장했던 노동자운동과 맑스주의의 융합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성립한 식민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국내에서 3·1 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무기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회사상이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무기로 수용되었다.

1916년 가을 동경에서 김철수 등이 결성한 신아동맹단은 "아세아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아동맹단은 3·1운동의 대중적 열기에 고무되어 1920년 6월 서울에서 5차대회를 열고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계급타파와 사유제도의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와 전국인구의 10분지 7되는 무산자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 창립대회에 8명의 대표를 파견하면서 상해파 국내지부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20 - 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 {개벽} {공제} {아성} {신생활} 등 잡지에는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빈번하게 소개되는 등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에 분화과정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서울청년회와 고려공산동맹의 리더였던 김사국은 1924년 3월 코민테른에 '조선내 공산주의운동의 발생과 분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유죄판결을 받은 '독립단'의 모든 성원들은 1921년에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문화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마르크스-공산주의자들' 등 독자적 사상을 가진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문화주의자들은 혁명적 활동의 방법을 부인하였고, 진화론을 선전하였다. 테러리스트들은 조직적인 테러와 점령기관의 파괴를 위해 크고 작은 테러의 시도를 적극 옹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주로 산업노동자와 혁명지향적인 청년들의 조직사업을 수행하였다."

'민중문화의 제창, 자유사상의 고취'를 내걸고 1922년 3월 창간된 {신생활} 6호에서 정백은 [노농로서아의 문화시설]이란 글을 통해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건설된 노농정부는 미술, 연극, 문학, 교육, 정치경제학, 사회과학 등 각 부분에서 새로운 민중적 문화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계급차별에 입각한 재래문화는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하여 법열의 장미원은 되어도 다수되는 민중과는 몰교섭한 전인류의 행복과 실생활을 떠난 한 사치품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는 실로 권위를 장식하기 위한, 구가하기 위한 위선적 … 문화였다. 그러나 무산자의 문화는 생활과 예술의 분열과 갈등이 없나니 노동과 예술이 혼연 일체 융화하여 만인이 노동자요 동시에 예술가가 될지면 따라서 생활이 예술화하고 예술이 생활화하여 생활은 곧 예술을 의미하고 예술은 곧 생활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鄭栢, [勞農露西亞의 文化施設], {新生活} 6호, 1922년 6월, 18쪽)

이와 같이 러시아혁명과 1919년 3·1운동을 커다란 분수령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 소개하면서 사상단체, 비밀 공산주의그룹들을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러시아혁명과 한국사회주의운동, 식민지 민족문제

러시아 10월혁명과 계급적·민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노농국가의 건설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내 동방소수민족 사이에 공산주의운동이 발생하고 확대되었다. 여러 민족의 공산주의 그룹이 결성되고 공산당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10월혁명은 동방제국의 사회주의운동의 강력한 촉진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발생하기 이전 러시아 지역에 이주해간 조선인들은 러시아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사상 수용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다른 사상적 조류와의 갈등을 겪지 않고 곧바로 전위당을 창립하게 되었다.
1920년 말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에 16개 이상의 조선인 당 조직이 존재하고 당원 및 후보자수는 2,305인이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각지에서 대규모 선전활동과 군사, 조직 활동을 수행했다. 조선어 전단과 소책자가 발행되고 조선인 적군 부대가 편성되어 일본 점령군과 백위군에 항거하여 투쟁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전위당 창립에 노력하여 1918년 4월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3 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톡에서 2차당대회를 열고 조선혁명에 대한 전술문제, 코민테른 가입문제,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여 박진순 등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혁명의 근거지로서 노동귀족화된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 대신에 프롤레타리아트 국제당으로서 출현하였다. 코민테른이 제2인터내셔널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지표는 민족 식민지문제에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맑스의 슬로건에서 코민테른이 '만국의 노동자,피억압민족이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건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20년 코민테른 2회 대회에서 레닌은 후진국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운동 문제를 강조하면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운동 대신에 민족혁명운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개량주의운동과의 구별을 하는 동시에 "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적 해방운동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경우에만, 또 우리가 농민 및 광범위한 피착취대중을 혁명적 정신으로 교육 조직하려고 하는 것을 운동의 대표자가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만 부르주아적 해방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또 지지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조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 또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함을 강조한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코민테른 2차대회에 참가한 박진순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해방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대회는 1919년 3월에 조선에서 발생한 격렬한 민족해방운동이 부르조아지에 의해 지도된 것임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확인으로부터 생기는 결론은 대중의 투쟁은 '민족적 적대의 허위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와같은 조건하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어떠한 형태를 취해도 운동의 발전에 대립하는 것은 바랄 수 없다". 동시에 대회는 이 운동이 '계급투쟁의 노선'상으로 이행하도록 선전수단을 취하고 투쟁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박진순은 한인사회당은 일본제국주의와의 공동투쟁을 위해 민족부르주아지와 근로자가 통일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인사회당은 "부르조아 정치가의 허위와 위선의 약속에 빠지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왜냐하면 근로인민은 현재 일본제국주의 강도의 억압에서 고통받고 있듯이 조선부르주아지의 압제에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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