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수(노동자의 힘 회원)
"이건 혁명이다.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와, 병사, 농민들의 계급투쟁이다. 지난 2월은 이번 혁명의 예비단계였을 뿐이다. ... 볼셰비키의 엄청난 힘은 바로 케렌스키 정부가 완전히 무시했던 대중들의 열망이 평화와 토지, 노동자 산업통제라는 볼셰비키 강령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존 리드, [뉴욕 콜]지에 타전한 전문 중에서)
1917년 10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10월10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무장봉기 계획을 승인한다. 그리고 10월20일,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25일 밤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하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주요시설과 케렌스키의 집무실이 있는 겨울궁전을 습격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26일에 열린 제2차 전러시아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 우파가 퇴장한 가운데 소비에트 정부의 출범을 선포한다. 이것이 1917년 10월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일어났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이다: 1917년 10월 혁명.
피의 일요일 학살로 촉발된 2월혁명이 짜르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임시정부의 형태로 부르주아정부를 출범시킨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절대다수 민중의 염원을 외면한 채 러시아 민중을 제국주의 전쟁에 내몰아냄으로써 위기를 자초하였다. 빵과 토지, 평화로 집약되는 볼셰비키 슬로건은 러시아 노동자-민중의 직접적 요구 그 자체였다. 임시정부나 제헌의회가 아닌 소비에트가 진정한 민중권력의 기관이었다.
그리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대독강화조약, 제국주의의 간섭전쟁과 그들의 비호 하에서 등장한 반혁명적 백군과의 전국적 내전으로 이어지는 러시아혁명의 숨가쁜 진행은 사회주의로의 발전경로를 가능하게 하였다. 맑스의 예상처럼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아니었지만, 제국주의 전쟁과 그로 인한 짜리즘의 총체적 위기와 그로 인한 혁명과, 동요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민중혁명으로 나아간 러시아혁명의 발전과정은 20세기 혁명의 전형적 사례로서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전쟁발발 때부터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배신으로 발생한 노동자계급운동 지도력의 공백은 변방의 소규모 조직이었던 러시아 볼셰비키와 그들의 지도자 레닌에 의해 돌파되었다. 주어진 정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명확한 전망 아래 부르주아 혁명을 노동자-민중이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킨 정치적 지도력은 러시아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의의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의 영토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의미를 가졌다. 러시아 혁명은 1차대전 종전 후 전유럽을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제1차대전시 자국의 부르주아 정부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지지했던 제2인터내셔널 사민주의/사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였다. 그 결과 1919년 국제노동자계급운동의 혁명적 주체이자 당사자인 제3인터내셔널이 러시아 공산당의 주도로 결성되어, 전세계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민중운동의 확산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제3인터내셔널의 운동은 비록 적지 않은 오류로 세계혁명을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을 드러냈지만,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해방혁명에 커다란 희망을 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2차대전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연결되었다.
동시에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으로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 분열을 가져왔다. 이는 외형적으로 인터내셔널의 분열로 나타났지만, 내용적으로 계급운동진영 내부의 혁명적 경향과 개량적 경향간의 투쟁이었다. 물론 제3인터 운동 내부의 좌편향은 파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게 한 역사적 오류가 있었지만, 러시아혁명과 제3인터내셔널은 혁명적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정치운동의 전범이었다.
또한 20세기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여러 세대의 혁명운동에 영감의 보고(寶庫)로서 기능했다. 러시아혁명 이후 어느 부르주아정부도 민중의 저항과 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한 정치를 논할 수 없었다. 혁명은 전쟁과 더불어 20세기를 관통하는 정치적 주제의 핵심이었다.
러시아혁명: 이론적 쟁점과 과제
러시아혁명은 맑스주의 진영에서 수많은 논쟁을 낳았다. 맑스와 엥겔스 사후, 국제노동자 계급운동의 사상적 대부였던 다수의 지도자들인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플레하노프 등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보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의 수호와 건설이라는 국내적 전선에서의 물리적 계급투쟁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맑스주의의 이론적 논쟁 또는 이론적 계급투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러시아혁명과 그 이후의 국제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과정은 여러 가지 쟁점들, 예를 들어 혁명의 단계론, 혁명의 전략전술, 계급동맹의 문제, 세계혁명의 전략문제, 제3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지위와 한계 등을 풍부한 이론적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한편에서 정치적 성공과 실패로 점철되는 복잡한 변형과정을 겪었다. 이는 이후의 운동에서 변형된 형태로 수많은 논쟁을 파생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진 시기 혁명의 전망과 이론, 전략과 전술에 대한 논쟁은 모두 러시아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볼셰비키당으로 대변되는 혁명적 전위당과 그 조직원리(민주집중제)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왜곡은 모든 노동자계급운동이 직면했던 공통의 어려운 과제였다.
이와 같은 쟁점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재해석-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구체적 사실보다는 정파적 교조에 근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맑스주의가 실질적으로 대중을 전취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가 아닌 공허한 교조적 문구의 나열로 전략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의 혁명이론은 지난 세기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평가와 검토에 기반해야 하되, 이는 논쟁을 위한 논쟁이나 학구적 논쟁이 아니라 구체적 계급투쟁을 통해 검증-발전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스탈린주의에 대하여
1924년 레닌 사후 스탈린은 정권을 장악한 후 러시아의 사회주의 발전을 주도하는 한편, 국제정치에서도 주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자본주의진영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스탈린은 강제적 집단화와 강제이주, 농민과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일련의 정치적 숙청(모스크바 재판), 개인숭배 등을 자행한 무자비한 독재자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반면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게는 러시아의 초강대국으로의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한 애국적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와 같이 모순되는 스탈린의 이미지는 모두 부분적으로만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공산주의가 하나의 운동에서 정치체제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정치적 비극은 국제노동자계급운동의 소련의 외교도구로의 전락과, 자주적인 노동자계급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의 사실상 말살-왜곡이다. 이는 특히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노동자계급운동에 결정적 질곡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왜곡은 단순히 개인숭배나 우상화의 문제보다는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는 등식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소련의 최고지도자로서 스탈린이 가졌던 정치적 권위와 그의 실제적 정치적 지도력은 별개였지만, 개별운동의 특정한 조건 속에서 계급대중으로부터 자유로운 관료적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용된 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맑스-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적 왜곡을 거치지 않고 건강한 혁명적 경향/조직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명확한 사실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보다 개념적 비판, 총체적 비판이어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만 21세기 새로운 혁명투쟁의 전망 속에서 지난 오류의 무의식적 반복을 피하고 다종다양한 좌파정치세력이 협애한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를 넘어 정치사상적 동질성을 회복하여 좌파통합을 이루기 위한 사상투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정치정세와 러시아혁명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극단의 시대" 20세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정치적 격변들의 하나지만, 그 영향력은 20세기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지난 1990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USSR)이 붕괴함으로써 일견 그 역사는 일단락 되고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테제를 비웃고 있고 또 본인 자신도 자신의 테제가 때 이른 것이고 과도한 일반화였다고 인정했지만, 그 시기 "역사의 종말" 테제, 그리고 "대안부재" 테제(There is no alternative: TINA)는 "악몽처럼" 노동자계급과 변혁운동을 억누르는 힘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는커녕,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자본주의적 착취-축적체제인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세계화, 지구화의 명목아래 전세계 노동자-민중에게 퍼부어졌다. 그리고 산발적 형태로나마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에 조직되기 시작했다.
1994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원주민봉기, 1995년 프랑스의 불만의 겨울, 1996-97년 한국의 총파업, 1999년 WTO 각료회의를 마비시킨 시애틀 전투 등. 특히 시애틀로부터 촉발된 반세계화운동은 새로운 대중적 저항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 운동은 2001년의 9.11 테러와 그에 이은 제국주의전쟁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국제반전운동으로 다시 강화-발전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라틴 아메리카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치정세는 예상을 뛰어넘는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일차적으로 경제위기의 폭발적 증폭에 따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고양되고 있다. 이제, 민영화의 폐해가 충분히 폭로됨에 따라,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투쟁은 멕시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 엘살바도르 등 남미전역에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멕시코, 베네수엘라, 최근 브라질까지 이어지는 정권교체 및 좌파정권의 등장은 남미 정치의 좌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위기는 준혁명적 상황에 이르고 있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정치적 전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경제적 위기와 대중적 저항의 확산 등, 혁명적 위기의 징후들이 혁명으로 귀결되지 못하는 것은 혁명적 전망과 지도력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남미의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혁명의 대륙적 확산을 불가피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집권중인 좌파조차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확한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구화공세는 자본주의를 항상적 위기로 몰아넣고 있으며, 이에 대한 계급적 저항은 점차 다양한 수위에서 조직-발전되고 있다. 특히 남미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새로운 계급적 대안과 사회변혁을 가시권에 두고 있다. 더욱 증폭되는 민중투쟁과 결합하여 사회변혁을 주도하려는 세력에게 1917년 러시아혁명은 지난 세기에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재생산될 수 있는 정치전략적 프로젝트 중의 하나이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