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 성난 농심 "쌀개방 안돼"

13일 전국농민대회 '유사이래 최대집회'…한·칠레협정 비준 거부도

농민들은 몇 시간 동안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유사이래 최대규모의 조직대오'로 기록된 올해 농민대회, 금성무대 앞쪽부터 늘어앉은 대오는 원효대교까지 이어졌다.

지난 11월13일 한강 여의도 둔치에서 '우리쌀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는 전국에서 15만명이 참가해 김대중 정부의 농정실패를 규탄하고 △쌀수입개방 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저지 △농업통상 농민대표 참가 △농가부채 특별법 제정 △식량자급목표 법제화 등을 주장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정현찬 의장은 대회사에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의 홍수 속에 농민들은 죽음이냐 투쟁이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이제 민족농업을 송두리째 앗아가려는 미국놈들과 개방론자들을 향해 뜨거운 투쟁의 불벼락을 내리자"고 호소했다.

유덕상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연대사에서 "뼈빠지게 일해도 소득이 늘기는커녕 빚만 느는 것은 모두 정부의 개방농정과 WTO의 압력 때문"이라면서 "노동자 농민이 하나돼 쌀개방 저지투쟁에 나서자"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특히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등이 연단에 올라 농업공약을 발표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권 후보는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 약속만 번지르르하게 했지 지킨 것은 하나도 없다"며 "농민과 함께 머리띠 두르고 투쟁하는 대통령 후보, 권영길을 지지해달라"고 말해 큰 호응을 받았다. 반면 노 후보와 정 후보는 연설 내내 계란과 돌팔매 세례에 시달려 대조를 이뤘다.

대회에는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과 문경식 전농 부의장이 각각 정치연설에 나서 쌀개방 압력의 주체인 미국을 규탄하고 대선에서 진보정당 승리를 호소했다.

참가자들은 성조기를 태우는 상징의식을 가진 뒤 여의도 문화마당까지 행진을 벌이고 각 도별 정리집회 장소로 이동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한편 본대회에 앞서 열린 사전집회에서는 정광훈 민중연대 노농특위장 등이 연사로 나섰으며, 노래패 '희망새'와 '우리나라' '소리타래' 등이 흥겨운 문화공연을 펼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이승철 keeprun@nodong.org

<사진>11월13일 서울 여의도지구 한강공원에서 15만여명의 농민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농민대회가 열리고 있다. 신동준 shindj@nodong.org


[해설] 무엇이 농민을 분노케 했나
'쌀농사 포기정책'에 절체절명 위기
빚은 눈덩이처럼 느는데 한칠레 협정·쌀수입 재협상까지

운집, 말 그대로 성난 농심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주도에서는 비행기 두 대에 나눠 타고
서울로 향했다. 최남단 진도에서는 1박2일 일정을 잡았으며, 최북단 철원에서는 꼭두새벽
주먹밥을 삼키며 달려왔다. 각 도연맹과 시군농민회 별로 형형색색의 깃발이 솟았다. 머리띠와
조끼, 완장, 혹은 뒤집어 쓴 쌀포대에는 모두 '쌀수입개방 반대' 구호가 적혀있다.
15만 규모의 '농민항쟁'이 서울도심을 뒤흔들자 이 투쟁의 배경과 요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국에서 버스 4천여대를 나눠 타고 일제히 서울로 오른 이들. 깊게 패인 주름에는 분노와
회한이 묻어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식지 않는 농민의 심장을 달군 것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농민들은 어떻게 모였고 무엇을 외쳤을까.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농업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농민들의 분노는 따로
조직된 게 아니에요. 마치 활화산처럼 자연스레 분출된 것입니다. 소득은 줄고 빚은 나날이
늘어나기만 하니, 이건 농사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농 강병기 정책위원장은 13일 농민항쟁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 집권기간 동안
농가소득 증가율은 1%대에 머문 반면, 부채는 50% 이상 늘었다. 자연히 도농간 소득격차는
커졌고, 이제 75.9%에 이르렀다.
지난달 체결돼 국회비준을 앞두고 있는 한·칠례 자유무역협정과 2003년 시작될 예정인 쌀수입
관련 WTO 재협상도 기다리고 있다.
한·칠레 양국은 지난달 24일 칠레산 사과, 배를 협정대상에서 빼되 일부 농수산물 등에
대해선 단계적으로 관세를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강 위원장은 "쌀수입 재협상에서 관세장벽이 철폐될 경우 농업의 존재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면서 "절대 위기상황에서 투쟁이 준비됐고, 이같은 농민의 정서가
대회규모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12월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에 나선 각
후보들한테서 '쌀수입반대' 약속을 받아내려는 의도도 있다.
전농이 내건 '8대요구'에는 한국농업의 위기가 그대로 베어있다. △쌀 관세화 유예와 수입개방
저지 △한·칠레협정 국회비준 거부 △농가부채특별법 재개정으로 부채문제 해결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 △식량자급 목표 법제화 △농업통상에 농민대표 참여 △'재해보상법'
제정으로 재해대책 마련 △쌀값보장 특별대책 수립 △농가소득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중 핵심은 역시 '쌀수입저지'다. 전농은 "쌀 관세화 개방은 쌀 자급률을 80%까지
하락시켜 쌀농사는 물론 연쇄반응을 통해 한국 농업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며
"식량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 우리 쌀값이
외국에 비해 6∼7배 가량 높은 상황에서 최대관세 비율인 400%는 사실상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매년 관세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실효가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특수한
지위의 작물인 쌀에 대해서만큼은 관세화 유예조치를 관철하고, 국내 소비량의 4%로 제한된
최소시장접근물량(MMA)도 더 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4월 쌀생산 억제를
뼈대로 한 이른바 '쌀산업대책'을 발표해 '시장개방을 준비하기 위해 쌀농사 면적 감축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요구가 절박한 만큼 투쟁 준비만도 9개월이나 걸렸다. 전농은 지난 3월 상무집행위에서
대회날짜와 규모를 확정한 뒤 활동가 토론회와 전국의장단회의, 시군농민회장단 수련회 등을
통해 대회조직에 박차를 가해왔다. 지난 8월과 9월에는 시군농민대회를 열어 투쟁 분위기를
띄워왔으며, 전농과 민주노동당, 전교조 등이 참가하는 '농업회생연대(준)'도 7월1일부터
10월13일까지 1백일에 걸쳐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전농은 이밖에도 '우리쌀지키기 1천만인 서명운동'을 전국에서 벌이는 한편, 10월31일에는
국회 앞에서 1만명 이상의 '이장단선언'을 열고, 선언용지를 각 당과 정부에 제출했다.
한편 정부당국은 경찰을 동원해 참가단의 고속도로 진입을 막고, 대회참가인원 축소지침을
내리는 등 방해공작을 펼쳐 빈축을 샀다.

이승철 keeprun@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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