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창]盧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있는 한 진보주의자의 충고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
노무현-정몽준 양후보의 ‘단일화’ 문제가 한때 장안의 관심거리였다. ‘우리편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두 보수정객 추종자의 일부는 물론이거니와 노무현의 ‘상대적인 진보성’을 높이 사는 진보진영의 일부마저도 “어떻게든 이회창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 하에서 ‘후보 단일화’의 당위성을 인정하려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의 대다수에게 노무현과 정몽준이 ‘단일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껄끄러웠다.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과연 그렇게 된다면 노무현을 계속 지지할 의미가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이회창과 정몽준 사이의 이렇다 할만한 차별성이 존재하는가. 물론 친일가문 출신의 노회한 친독재 정객보다는 친미재벌 ‘왕조’ 출신의 ‘깔끔한’ 중년의 사업가이자 국제적 스포츠관료가 조금 더 ‘멋이 있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친일부역마저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는 미국의 베트남침략에서 자본을 만든 ‘현대왕국’의 약력 정도야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통치자들의 부패에 ‘만성적 피로’를 느끼는 민심을 저질 폭로로 끌어들이려는 이회창 식의 구시대적인 ‘정치술’보다 ‘월드컵’이라는 거대형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쇼를 통해서 일약 유명인이 된 정몽준의 ‘수완’이 훨씬 나은 것을, 필자마저도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별성’을 이야기하자면 대략 이 정도일 뿐이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는 극우신문과 군부, 그리고 국가정보기관의 은밀한 지지를 받는 이회창보다 이북의 자원과 노동력의 이용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는 ‘현대왕국’의 대표자 정몽준이 조금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평상시에야 그렇겠지만 종주국 미국이 북한을 ‘제2의 이라크’로 지정해 본격적인 도발에 나선다면 대미 의존성이 강한 재벌의 대표자가 이를 막을 만한 결단력이 과연 있을 것인가. 노동정책 같으면 ‘현대왕국’의 과거와 현재의 비정규직 착취 등의 상황으로 봐서 그 대표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회창 정도나 그 이상의 신자유주의적, 노동탄압 정책을 전개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그러면 정몽준으로 이회창을 막자는 이야기가 과연 말이 되는가. 고급관료층의 대표자인 이회창도, 재벌세력의 대표자인 정몽준도, 그 발언과 공약상의 차이가 있어도 그 사회경제적 성격상 결론적으로 ‘극우 기득권 세력’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만약 노무현이 그 지지자들에게 “정몽준 찍어달라”고 호소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성향의 지지자에 대한 일종의 ‘배신’일 것이다.

개혁성향의 노무현 지지자 입장에서는 ‘개혁지향적 온건보수’로 보였던 노후보가 극우들과 야합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강건했던 그의 지지층인 개혁성향의 젊은층이 크게 흔들리거나 붕괴될 가능성이 높고, 노후보의 정치적 미래가 많이 어두워질 듯하다.

물론 이회창과 정몽준의 계급적인 배경과 사회적 성격, 그리고 예상되는 정책방향(즉, 극단주의적 신자유주의)이 비슷하다고 해서 두 후보가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연령 차이도 분명히 있고, 국내의 국가억압기관에서 줄곧 종사해온 사람과 ‘화려한’ 국외 유학과 활동을 전개한 사람 사이의 시야 차이도 분명히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국외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한국 재벌 ‘황제 2세’의 근본적인 권위주의적 성격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고려한 것은 노후보 측의 하나의 큰 ‘악수’(惡手)로 봐야 할 듯하다. 정후보와 사회적 배경과 이념, 정책방향, 지지층 구성 등에서 상당히 다른 노무현 후보가 자신의 독자적인 노선으로 끝까지 감으로써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떳떳한 온건보수’의 본보기를 만들어줬으면 한다.

한국사회에서 온건보수가 그 나름의 위치를 차지해야 진보정치인들에게 진정한 대화의 상대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113호] 11.25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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