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김정구가 부른 흘러간 노래 가운데 '노다지 타령'이 있다. "노다지 노다지 금 노다지 노다지 노다지 금 노다지 / 노다진지 칡뿌린지 알 수가 없구나 / 나오라는 노다진 아니나고 칡뿌리만 나오나 / 성화가 아니냐 엥여라차 차 차 엥여라차 차 차 / 싯누런 노다지야 어디가 묻혔길래 / 요다지 태우느냐 사람의 간을 / 엥여라차 차 차 엥여라차.) 이 노래에서 '노다지'라는 말은 금이나 금이 쏟아져 나오는 금광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금맥을 찾았거나 한 곳에서 많은 이익이 쏟아져 나올 때 흔히 '노다지'라는 말을 써왔다. '손대지마!'하는 영어의 'No Touch'의 발음에서 비롯된 이말 뒷면에는 한말 이 땅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노타치'가 '노다지'로 바뀐 사연
1894년 농민전쟁이 좌절된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금광·광산 채굴권, 삼림벌채권, 철도부설권 같은 경제적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실은 이권을 팔아 자신을 보호하고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였다.
조선 최대의 운산금광 채굴권이 알렌의 주선으로 1895년 7월에 미국인 자본가 모오스에게 넘어갔다. "채굴기간 25년, 자본 1/4 왕실소유, 광산설치와 채굴에 필요한 자금·기기면세"라는 조건이었다. 1897년 채굴권은 다시 미국인 자본가 헌트의 '동양광업개발회사'에 넘어갔고, 왕실소유 주식지분도 한꺼번에 사들여서 미국인이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계약기한도 1938년까지 15년 더 늘렸다. 미국인 광산 관리들은 조선인이 광산에 접근하면 금을 훔치려 한다고 총질을 하여 두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접근하지 말라고 'No Touch'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다.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노 터치!'라는 말을 그냥 금이나 금맥 같은 광물을 뜻하는 말로 들으면서 '노다지'라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인 회사는 1902년 그때 돈으로 총 경비 60만여원을 들여 금을 파내 1백25만 원어치가 넘는 금을 일본에 팔았다.
1897년부터 1915년 사이에 운산금광의 금 생산액은 약 4천9백5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한강다리 하나 놓는데 40만원쯤 들었다고 하니 '노다지'가 일확천금 할 수 있는 금광이라는 말로 쓰였을 법하다. 이 돈은 조선이 1910년 8월 일본에 강제합병 당할 때 일본에 진 빚 4천5백만원보다도 많은 액수였다.
반봉건 반침략 투쟁에 나섰던 농민군을 10만명 이상, 많게는 30~40만명을 일본군과 함께 학살하였던 조선정부가 한 노릇이 이런 것이었다. 이런 역사를 되돌아보면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경제특구법'은 이 땅의 자본과 권력이 제국주의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다지' 공간을 만들어주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주장은 '노터치'하도록 하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미국의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광산, 해운, 철도를 중심으로 자본을 침투하여 조선을 원료공급지, 상품판매시장, 값싼 노동력시장으로 바꿔갔다. 따라서 초기 노동자들은 주로 이 부분에서 늘어났고 노동운동 또한 이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1900년에는 영국자본의 은산금광에서, 1899년과 1901년에는 독일자본의 금성당현금광에서, 1901년에는 일본자본의 직산금광에서 광산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저항하였다.
광산 뿐 아니라 개항을 계기로 인천 부산 원산 목포 등 개항장에서는 화물을 운반하고 포장하는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직업으로 부두노동을 하는 노동자 수가 1897년에 1천여명, 1902년에 2천여명, 1903년에 3천여명, 1906년에 5천여명이었다. 임시로 부두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포함하면 이보다도 훨씬 많았다.
부두노동자들은 쌀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두량군,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칠통군, 지게군, 하륙이 있었으며, 운반거리와 무게에 따라 임금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상인 자본가에 고용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은 날이 밝아서 어두워질 때까지 고된 일을 하고도 점심은 굶고 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1898년에서 1903년 사이 목포의 부두노동자들은 일본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여 8차례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임금투쟁, 임금의 10%를 떼어먹던 중간착취자인 십장에 대한 반십장운동, 거류지에서 일본패 착용을 반대하는 반 일본패 운동이 중심이었다.
외국자본 제국주의 침탈 속 가혹한 노동조건
철도는 많은 원료와 상품, 사람을 옮길 수 있는 운송수단으로 제국주의 침탈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철도건설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경인선, 경부선 부설공사에 경인지방과 부산지방의 도시노동자들과 영세농민들이 철도건설 노동자로 참여하였다. 경부철도 공사에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가 받은 임금은 단순노동자가 최고 40~50전, 전문기술자가 60전 정도였다. 이는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수준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기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철도건설에 강제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노동력 강제징발에 반발하는 저항의식은 반일·반철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04년 9월에는 경기도 시흥군에서 수천여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강제동원에 앞장선 친일 군수와 일본인 2명을 죽였다. 이 무렵 황해도 곡산에서도 경의선철도 공사를 맡고 있던 일본인 청부업자 8명이 주민들의 손에 죽었다.
광산, 부두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초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조건에 저항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한 생존권투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과 그 앞잡이 노릇을 하던 매판세력에 대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출발이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노동자교육센터(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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