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바람에 그대 넋이”를 보고 ― 故박창수 위원장에 대한 기억


지난해 12월 20일 부산대에서 부산경남울산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 주최하는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이번 음악회는 고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 진상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바램에서 준비되었는데, 공연을 보면서 박창수 열사의 삶과 진상규명뿐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의 치열함과 원칙이 현재 우리 활동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 거부 투쟁 승리와 민주노조 건설 투쟁

한진중공업 노조는 63년 5월 25일 결성된 전국해상노조 대한조선공사지부가 전신이다. 무려 24년간이나 파업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쟁의 한 번 없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86년 투쟁을 시작한다. 86년 김진숙을 비롯한 몇몇의 민주 대의원이 당선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도시락 거부 투쟁과 노조 민주화 투쟁을 전개한다.
당시 박창수는 배관공장 대표였다. 도시락 거부 투쟁은 조합원들의 그간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단결해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사측은 이 싸움이 있은 후 8월 김진숙 등 세 사람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냈다. 해고자들은 해고 투쟁을 전개했고 마침내 87년 7월 25일 조합원들은 투쟁으로 화답했다.

직선제 쟁취와 흔들리는 민주 집행부

그러나 직선제로 당선된 민주 집행부는 사측과 조합원의 눈치만 보면서 관리자들에게 끌려 다녔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88년 무노동 무임금 철회를 위한 파업과 16일간의 가두시위, 89년 임단협 시기 전체 파업, 파업 기간 중 삼화고무 구사대 테러 사건에 항의하는 연대시위가 이어졌고, 90년 5월 한진 그룹으로 인수된 후 조합원들은 어김없이 파업 투쟁을 선택한다.
이런 투쟁 속에서 조합원들은 직선제라는 형식이 곧 민주노조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투쟁속에서 신의가 있고 올곧은 신념을 가진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해방 투쟁의 선봉, 한진중공업 노조

이런 투쟁의 결과 90년 7월 조합원들은 박창수를 14대 위원장으로 밀어 올렸다. 이때부터 한진 중공업 노조는 근로기준법 투쟁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노동해방 투쟁의 선봉, 부산 노동운동의 중심 노조로 우뚝 섰던 것이다.
박창수 위원장은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었다. 구속된 박 위원장은 전노협 및 대기업 연대회의 탈퇴를 해고자 복직과 맞바꾸자는 안기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밖에 있는 노조 간부들이 열심히 싸울 것을 당부했다.
박위원장은 구속 중인 상태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머리부상을 당한 후 안양병원으로 이송되고 그 뒤 이틀 만에 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가 강제로 시신을 탈취해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부검한 뒤 자살로 처리해 버렸다.

자본가 정권의 탄압과 의문사

2002년 9월 16일 모든 조사활동을 끝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0월 24일 박창수 열사 사건에 대해서 민주화운동 여부는 인정하나 사인을 알 수 없으므로 조사불능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불능!!!”
이런 현실의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유가족들만의 힘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투쟁만이 선배 열사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가권력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하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선배들의 투쟁정신을 계승하고 투쟁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다.

박진영 울산노동자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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