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독자에게]기후협약과 ‘문화협정(가)’
2001년 초, 세계 최대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인 미국이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京都) 기후협약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천명, 국제적인 파문이 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협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세계 38개 주요 공업국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최대 목표로 하고 있는 이 협약의 골간이 흔들리기 때문이었지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 세계의 환경단체들과 주요 국가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한술더떠 기후협약 대신 새로운 대안을 만들겠다고 밝히면서 아예 기후협약 탈퇴까지를 거론하고 나섰습니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25% 이상을 배출하는 미국이 만들겠다는 새로운 대안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개도국들을 배출규제의 틀에 가두고 자국의 부담을 더는 방식으로 이익을 도모하자는 속셈이었겠지만, 뻔히 보이는 이런 속셈에 넘어갈 나라는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직까지 미국은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국제 협약의 합리적, 획기적 개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신음 소리는 외면한 채, 다만 힘의 논리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제국’의 ‘패권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일국의 ‘패권주의’만으로 치부하는 듯해서 조금은 안 됐습니다만, 이 같은 문제는 문화 영역에서 더 광범위하고 일상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국의 이익 도모 때문에 지구 환경이 위협받듯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양한 종(種)의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미국주도의 세계무역기구(WTO)는 전 세계를 무역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단일 경제권으로 묶으려 합니다. 뉴라운드 도하개발의제(DDA)를 통해 전 세계에 각 영역별 생산물의 특수성과 무관하게 동일한 조건 하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문화 상품도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에 의거, 개방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칠레,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이미 자국의 문화시장이 설 곳을 잃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NGO들은 농업, 환경, 문화, 교육, 의료와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이나 존엄성, 가치 등 상호공존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영역의 산물들은 신발이나 자동차와 같은 일반 상품과는 다른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백 번을 양보해도 이러한 주장만큼 인류 생존의 조건에 부합하는 말은 없습니다. 환경이 자연 생태의 공기, 산소를 상징한다면, 문화는 사회 생태의 공기, 산소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생물학적 인간생존의 조건이라면, 문화는 사회학적 인간생존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후협약처럼 별도의 ‘국제 문화협정(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캐나다 프랑스, EU 등을 중심으로 ‘문화다양성을 위한 국제협정’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나마 배부른 경제가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문화를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국제 문화전문가 단체(CCD)’ 제2차 총회가 2일부터 빠리에서 열립니다. 한국대표단은 모범사례를 발표하기 위해 멕시코, 칠레, 뉴질랜드와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습니다. 회의의 결과와 그 자리에서 논의되는 많은 것들이 ‘풍요 속 빈곤’에 시달리는 국내 문화계와 문화정책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를 바래봅니다. 언제까지나 풍요 속 빈곤 속에서 모범사례로 선정되는 ‘특이한’ 예가 허락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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