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먼저, 국민은?

광풍이 지난 후의 정적이다. 몇천만이 허탈해 하는 가운데 상당수는 분풀이 상대를 찾고 있는 듯 하다. 허나 어쩌겠는가. '내 잘못'인만큼 이제 잊자하며 우리는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래도 머리 속에서는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1등에만 당첨되면 못 다한 자식 노릇 '쉴 새 없이' 해 드릴 수 있었고, 파마 한 번 하는 것도 망설이는 내 동생에게 오빠 노릇 근사하게 했을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내복 빼고는 죄다 얻어다 입힌 내 아들 외출복도 (할인매장 아닌) 백화점에서 아래 위 세트로 줄줄이 구입했을 것이고 큼직한 내 마누라 피자 사주는 것, 붕어빵 사주는 것보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난 어떻고. 나야말로 큰 칼 차고 세상에 나가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하늘 아래 두려운 게 무엇이겠는가. 시도 때도 없는 망상은 복권을 샀을 때나 '꽝'인걸 확인한 후나 정말 언제든 달디달다. 중독 초기인가?

이 로또라는 걸 놓고 말들이 많은데 나라님들만큼은 초지일관이다. 삶의 활력을 주는 건전한 여가활동이고 공익을 위한 거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빨아서 리본 달고 꽃 달고 향수를 뿌려도 걸레는 걸레다. 그걸 아니라고 강변하는 '국가'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공익사업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공익사업이라는 것들, '책임 있는' 국가라면 국민들에게 의당 해 주어야할 것들 아닌가? 삶의 질을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교육을 위해, 청소년을 위해 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국가가 '세금'을 잘 활용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이지 돈 뜯어 생색내며 해줄 것은 아니다. 국가가 세금 이외의 돈을 국민을 위한답시고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털어 간다면 이는 시장 상인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조직폭력배'에 다름 아니다.

편히 앉아 돈을 벌겠다고 이 '大韓民國'이 하는 '다양한' 짓거리들 중에 하나는 순수해야 할 스포츠를 대표적 돈벌이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과천 경마장에서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사람들의 돈을 긁어가더니 외국인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 한번 해보겠다며 제주도에 경마장 하나 차렸는데 관광객은 커녕 제주도민들만 감귤 농사로 번 돈 날리고 있다. 내년이면 김해에도 큼직한 경마장이 하나 더 생겨난다.
일본 사람들 본 따서 경륜장과 경정장도 만들었다. 이젠 지자체들도 돈에 무슨 한이 맺혔는지 도박 스포츠 시설 유치에 혈안이다. 대전, 전주, 나주, 부평은 경륜장, 안산, 의왕, 부산, 인천은 경정장, 담양군은 경마장을 유치하겠단다. 거기에 이제는 개달리기(경견)에도 돈을 걸겠다 하고 유명한 청도의 소싸움에도 배팅을 하게 되었다 한다. 지자체들이 그 많은 돈 벌어서 얼마나 잘 활용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그렇게 큰 돈인가? 그렇다. 작년 경마 매출액이 7조 5천억원이 넘었고 경륜 매출액은 2조 3천억원이다. 작년에 새로 출발한 경정 빼고도 10조원이라는 이야기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 수출 총액이 17조원이라는데 스포츠 도박이 이를 한 이삼년이면 따라 잡을지 '내기'라도 걸어볼 일이다.
나는 도박산업의 '매출액'이라는 단어가 기분이 나쁘다. 이 매출액이라는 게 실상은 국가가 국민에게서 삥 뜯어간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소년을 위해 사용한다는 저네들의 논리가 기가 막힌다. 그 부모들 거덜내 가정을 풍비박산 만들어 놓고 그 애들은 어떻게 가르치고 보호하겠다는 것인가. 물에 빠뜨려 놓고 구해주겠다는 심보인가? 이 모든 게 열받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뻔뻔스런 무엇이 있다. 경마·경륜 장외 사업소 만드는 데 열심인 사람들, 정말 짜증난다. 전국에 경마 장외 발매소(이른바 TV경마장)는 28개, 경륜은 12개인데 증가일로이다. 이는 최소의 재정·인력투자로 최대의 금전적 보상을 보장받으려는 매우 가증스러운 사업이다. 여기엔 '도박꾼'들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무슨 삶의 질이 있고 여가가 있겠는가?

이제 大韓民國이라는 '국가'로 초점을 맞춰보자. 우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국가가 갑자기 돈이 필요하단다. 이제까진 돈이 없어 잘해주지 못했나보다. 그런데 그 이기적인 지배 계급조차 (노동자를 착취한다 하지만) 적어도 '생산' 단계를 거쳐 이윤을 추구하는데 국가는 모든 중간 과정을 무시하고 편의주의적이고 독점적인 방식으로 국가 자본을 비축한다. 특히 몇 천억에 이르는 투자 비용을 단 몇 년에 회수하는 엄청난 고 이윤산업을 독점하고 있다. 이 정도의 수익성은 조직폭력배가 연관된 사업 아니고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있지도 않은 희망에 서민들이 농락당한다. 그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의 어머니들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도 '내 잘못이지' 했듯, '내 잘못'을 탓하며 저 구석에서 반성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 주범은 바로 우리를 보호해야할 국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못된 버릇을 탓하며 경마, 복권을 경계의 대상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국민들인가? 국가가 자기 위한답시고 그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말이다.

정희준 / 부산 동아대 체육대학 교수 chunghj@daunet.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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