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386세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비단 20대만이(그 당시의 대학생으로 표상 되는 그들) 80년대의 엄혹한 시대를 살아낸 것도 아니고 386세대만 87년 대투쟁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유독 386세대는 87년의 투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를 중심으로 스스로의 세대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왜?
여기서 '386'이라는 말이 공론화 되기 시작한 것은 97년부터인데 이는 무척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97년은 정권교체라는 DJ정권의 화려한 등장과 IMF로 표상 되는 외환위기가 있었던 해다. DJ정권의 등장은 그 동안 남한사회 내의 재벌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에 대한 새로운 동인을 대중적으로 형성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동의지반을 형성했다. 바로 이 시점을 계기로 386세대는 다만 그 시절의 젊은이를 지칭하는 시사용어를 뛰어넘어 386이데올로기가 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누가 왜 386을 말하는가.
자유주의가 한번도 정치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남한사회의 특수함에도 불구하고 87년 대투쟁 이후, 386은 스스로를 개혁적 자유주의자라 칭하며 정치의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NGO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그들은 바로 YS와 DJ정권을 계기로, 시민의 이름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역할에 주력하면서 국가운영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세력이 된다. 이들은 비정부단체를 자처하면서 민중의 갈등을 체제 내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민중의 정치를 그들이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또한 이런 정치적인 세력과 함께 기존 대기업모델에 대한 대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벤처창업의 바람을 몰고 또 다른 386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하나같은 열망은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게다가 비효율적이기까지 한 재벌중심의 체제를 바꿔내는 것이었다. 더불어 권위주의적 체계, 관료적이고 고루한 '기득권'에 대한 불만을 중심으로 세대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개혁적 지식인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386이데올로기에 동승한다.
문화예술의 경우 87년 이후, 예술의 산업화, 금융화를 동반하면서 민중예술의 대중화 기치를 들고 민중예술과 대중예술을 고의적으로 혼돈에 빠뜨린다. 그래서 결국 80년대 말부터 문화예술인들의 논쟁은 표현의 자유로 집중되고 그들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표현의 자유'아래 포르노로 흐르는가 하면, 이제는 문화예술운동을 운동의 형태로 찾는다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것은 개혁적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학자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적인 예로 언제나 과거 정권 말기에 비판의 목소리를 서슴지 않았던 지식인들은 DJ정권 말기 침묵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의 핵심으로 소위 개혁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지원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거세하면서 기껏해야 정책조언 수준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들의 이상향이란 미국식 법인모델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386의 진보성이란 87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그친 '좌절된 운동'의 결과 위에 놓여 있는 것이기에 그들이 인식하는 현실이란 당연히 누구나 자신의 견해와 이익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번 대선에서 그들이 보인 행보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
연일 신문에 기획되는 신주류가 된 386의 이야기는 소위 잘 나가는 운동권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진보에 대한 관념과 민중운동 '패배의 역사'의 단면,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적극적 지지자가 된 그들의 오늘을 보여준다. 노무현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인 386과 노무현 정권의 '진보'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386세대로 동일성을 강조하고 과거 87년 민주항쟁을 팔아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대중적으로는 대투쟁의 향수로 스스로의 진보성을 드러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이념은 진보는커녕 과거퇴행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87년 대투쟁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따라서 91∼92년 대중운동의 실패, 계급투쟁의 패배는 그들로 하여금 유학을 길을 떠나게 하거나 새로운 대안, 자유주의적 전망에 자신의 변혁전망을 가두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386은 신문지상에서 떠드는 것처럼 신주류임에 확실하다. 그것은 다만 변혁노선의 포기에 따른 주류로의 편입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미 386으로 대표되는 세대가 주류가 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토대가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남한사회가 자본유치형 국가로 변모하면서 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우선순위가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실질적인 수혜자가 현재 신주류로 부상하는 386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자, 386세대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오늘날 386은 우리에게 현실운동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91∼92년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운동에 대한 전망을 밝히지 못하면서 대중투쟁을 포기하고 신자유주의 전략이나 사민주의 전망으로 투항한 386의 오늘을 통해 노무현정권의 출범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예니 /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 yenie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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