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국가의 이데올로기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지극히 온당한 결정을 내렸다. 그간 헌법소원을 비롯해 다양한 투쟁으로, 동성애자들은 청소년 성적 소수자-굳이 말하자면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관련 사이트의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하도록 투쟁하여 왔다. 문제의 원인은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 7조의 개별심의기준을 통해 동성애와 관련한 정보들을 포괄적으로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규정하고 청소년들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장단을 맞춰 각 인터넷 사이트들은 아예 동성애란 검색어 자체를 '성인용'으로 분류하고 알아서 기는 충정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성애가 질삽입성교라는 한 점의 성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인격적 주체성이듯이 동성애 역시 그런 것이라고 장황히 설교할 생각은 없다. 바로 그런 성 정체성을 둘러싼 비대칭적인 사유야말로 동성애와 이성애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자기와 평행한 성정체성으로 인정할 수 없을 때, 그 너머에 있는 성들은 대개 한 점의 성행위로 곤두박질친다. 그나마 자기네들끼리의 공유하는 사회적 체험과 문화적 습속을 만들어낸 동성애자들이나 이성애자와 겨룰만한 성의 인구를 이루었을 뿐이다. 사도마조히스트들과 양성애자들과 기타 소소한 성애의 주체들은 그저 성을 둘러싼 그 짓을 하는 잡년 잡놈들일 뿐이다. 물론 필자는 그들이야말로 성적 소수자라고 주저 없이 생각한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은 사실 매우 소극적이고 보수적이며 또한 충분히 너그럽지 못하다.

그런데 이토록 불충분한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대표되는 보수적 기독교단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하며 성명을 발표하고 언론 매체를 통해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보수적 기독교단의 그악한 주장에 기가 죽어 청소년보호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예의 '국민적 정서와 여론'을 고려해 결정을 철회하거나 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알다시피 보수적 기독교계는 국민의 정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다. 국민의 정서를 언제나 감시하고 살펴, 국민들의 패덕한 정서와 불순한 육신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일에 관한 한, 그들은 눈가에 켜둔 등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성적 소수집단과 보수적 기독교계 사이의 불화와 적대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교회가 가족의 영역에 마지막으로 집을 짓고 이성애적 관계를 돌보는 목자의 구실로 전락한지 오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교회가 독점해야 할 그 영역의 기능은 이미 심리치료와 가정상담과 싸구려 티비 프로그램이 가로채고 탈취한지 오래이다. 교회는 청교도주의의 시대처럼 가족과 연애, 성장과 결혼의 반듯한 삶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유일한 권력이 아니다. 그들도 역시 수많은 일상생활의 자유주의와 그를 반영하는 제도와 시장과 겨뤄야 살아남는다. 따라서 보수기독교단의 반발은 자연스럽고 또 심지어 민망하고 애처롭기까지 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은근슬쩍 건망증에 빠진 채 넘어가는 문제를 짚어야 한다. 문제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이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90년대 중반 이후 탈학생화된 청소년들과 그들에 대한 부모-어른의 불안을 내면화한 국가기구이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청소년을 둘러싼 근대적 훈육의 제도이던 학교-학부모-교사의 삼위일체가 위기에 빠지면서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국가기구이다. 우리는 이 국가장치가 학생이라는 자명한 일반적 정체성이 아니라 청소년의 일상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기구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식민적 자본주의의 역사적 계보 속에는 학생이라는 주체가 숙명적인 자리였다. 물론 가족은 곧 국가였고 또 공장이었지만 그것은 식별될 수 있는 종차(種差)를 가진 사회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그 차이가 더 이상 상징화될 수 없는 가족-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서태지 세대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분란을 겪으며 또 붉은 악마 세대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화해극을 겪으며 근대적 학생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된 청소년을 이해하려 진력하고 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대학 진학과 학생으로서의 본분이 더 이상 쓸모 없게 된 시대에, 청소년들의 삶을 국가 지배의 틀 안으로 다시 집어넣으려는 기획을 반영한다. 이제 청소년을 학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욕망과 신체를 지닌 주체로 직접 다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자와 다른 성적 소수자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보수기독교계가 아니다. 가족-국가의 출현은 동시에 모든 사회적 정체성을 이성애적 훈육과 통제의 틀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다. 비이성애적인 삶의 자유는 가족-국가의 바깥에서만 꿈꿀 수 있다. 그 안에 머문 채 아무 힘도 없는 불쌍한 사제들과 싸우지 말자. 비가족적인, 비이성애적인 삶의 자유를 상상하자. 청소년보호위원회를 해체하자.

서동진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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