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전시되어 있던 모든 작품에 대한 감상포인트는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항시 자아정체성에 위기감을 갖아왔다던 "곽덕준"의 작품이라는 오만과 편견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사실 재일교포라는 위치가 결코 동정의 시선이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한국 가면 한국사람 대접 못받고 일본 가면 일본사람 대접 못받는 그룹인 건 맞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도 우선 말이 않 통하면 없는 사람 취급을 잘 하는 편이다. 혹시라도 내가 외국에 떨어져있는 상태라면 나 스스로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을 거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홍성욱교수의 "하이브리드 세상 읽기"에서 나오듯, 백의민족을 강조하면서 순종병에 사로잡혀있던 한국인이 하이브리드한 - 즉 잡종적 - 삶과 사고를 갖는다는 건 21세기에 들어서야 근사한 일이 된 것이다.

처음 전시관에 들어가면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다.
제목은 "자화상". 곽덕준 ( 이하 "곽") 자신의 모습을 유리에 이리저리 이그러트리고 있는 모습이 10분 내내 계속된다. 왠지 유리라는 곳에 비치는 모습은 투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방어막이라도 필요하고 앞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그러지고 있는 곽의 모습 속에서 곽의 정신세계는 커녕 정상적인 얼굴도 알아내기 힘들다. 역시 어디에서나 항상 타자일수밖에 없었다던 리플렛 속 작가의 개인사가 나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작품, "미국대통령과 곽" 시리즈 중에 "클린턴과 곽"이다. 제일 맘에 든 시리즈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예상치 못했는데, 곽의 작품엔 마치 미 제국주의를 부드럽게 비꼬는 듯한 작품이 몇가지 눈에 띈다. 솔직히 작가의 의도를 판단하긴 어려운데, 분명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작가의 불유쾌한 감정은 알 수 있지만 미국의 대통령이면 세계의 독재자인 인물들을 자신과 겹치는 모습은 질투의 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질투든 핀잔이든 경멸이든 간에 정말 천재스러운 작품인 건 사실이다. 타임지앞에 거울대고 얼굴 맞댄 다음 사진 찍어볼 생각 해본 사람 (^^)/ ?

이 작품은 "무의미"시리즈중 하나이다. 사실 이번 전시의 부제목은 "무의미의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전시의 목적과 부합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각해보긴 했으나, 이런 근사한 단어유희에 빠져들기엔 단순한 사람인지라 정말 "만화같군"이라는 한단어로 바로 정리가 되었다. 물론 꼼꼼히 살펴보다가 오른쪽 끄트머리쯤 가면 "내가 이 작품을 왜 이리 열심히 보고 있었는지" 무의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밤의미소" 이다. 마치 인디안이나 아프리카족의 가면들과 같은데, 수많은 눈초리들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자니 단편만화 연작시리즈를 읽고 있는 기분이다. 가운데를 보아도, 왼쪽 위를 쳐다보아도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한결같이 나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한참 재미있게 보다가 생각보다 얼굴들이 다양하지 못해서 이내 실망해버렸다. 5칸 지나면 같은 모양 얼굴, 3칸 지나면 또 같은 얼굴..
곽의 작품에는 이것 말고도 눈을 그린 작품들이 꽤 있다. 뭔가 꼬여 있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를 상징하는 건가? 아니면 사물에는 모두 눈이 달렸다고 생각했나?
그냥 보기엔 무서울 것 같지만 실제 그림들은 정말 따뜻하고 해학적이다. 고민과 고독은 있었으되 인생이 허무하고 비관적이지는 않았었나보다.

측정 이벤트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이다. 리플렛에 있는 문구를 잠깐 인용하면...
"전화박스, 등롱, 계단 등에 줄자를 댄 사진 작품을 통해 시간이 오래된 오브제를 계측함으로서 역사나 추억 등, 계측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계측의 잣대를 들여대는 넌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냥 볼때는 잘 몰랐는데 한참 보고있자니 줄자들이 모두 같은 너비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줄자를 잘라 붙인 것 같지만 눈금 너비가 다 틀리다. 하나의 탑을 측정함에도 밑둥과 허리와 머리는 모두 다른 너비의 눈금이 필요했나보다. 역사나 추억등을 재는 거라서 그런걸까? 혹시나 측정이 되더라도 표준이란 건 없는 것들이니까.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전시실에 저울들이 서로 겹겹이 쌓여 있는 작품 보신 적 있는지? 그것도 곽의 작품이다.

이 작품 제목은 "사회-벽화"인데, 중고교 시절 미술책에 나오는 벽화 그림들이 조그마한 칸에 잔뜩 그려져 있다. 그냥 구경하면 마치 불루마블 같은 보드 게임판 같이 생겼다. 왠지 주사위 놀이하거나 같은 그림 맞추기 하거나 그러면 좋을 것 같다. 그림이 재미있어서 수첩에 옮겨 그리고 있으려니까 지나가던 한 어머니가 왠지 중요한 그림인 줄 알고 아이들에게 "안의 그림들을 자세히 봐" 라고 말했다.
"저는 선무당인데요?"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부모를 부끄럽게 만드는 건 정말 않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차라리 "어? 소뿔이다~~!"라고 외쳐주었다면 아이들도 다른 모양 보면서 "앗, ***다"라고 외치며 즐기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물론 미술관 직원은 시끄러운 분위기에 열받을거고 나도 미술관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아이들에겐 전시실 미술은 않맞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퍼포먼스 형식으로 예술을 체험시켜주면 정말 좋아할텐데..

이 작품의 제목은 "풍화" 이다. 이 시리즈는 ( 이 작품도 하나가 아니다 ) 작가의 생애와 창작 세계를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작품들이란다. 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작가의 작품을 연대별로 묶어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구획이 나뉘어진 3부분은 원래 서로 독립적인 작품들이고 만들어진 연대도 모두 틀리지만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곽, 사회와 사회 사이의 곽, 무의미 한것들 사이의 곽, 무의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들 사이의 곽인 셈이죠. 이 시리즈들의 구성은 "풍화"와 똑같다.
왼쪽 추상화는 역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가운데는 곽 자신의 모습이, 오른쪽은 마치 미국의 침략사를 규탄하는듯한 미군과 경찰, FBI등의 모습으로 채워져있다.
이밖에도 곽의 작품에는 "저것도 작품이야?" 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몇개 있다. 엄청나게 큰 도화지에 정신없이 해놓은 신문 스크랩, 일본의 어느 도시 공기를 담은 노란 통과 그 당시 행동에 대한 작은 메모.. 간혹 이상한 소재와 그것들의 괴이한 구성과 이를 행한 작가의 행동을 볼때면 내가 하면 "청소하지 않은 것", 작가가 하면 "작품"이라 부르는 건 아닌지 고약한 마음이 들때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정도 결국 질투의 산물이다. 하물며 1937년생이 가지고 있는 "청소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자유로운 정신을 이제 겨우 30대인 나는 유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추상이나 설치, 영상 단계로 넘어오면서 미술에도 사용되는 도구가 정말 다양해지는 것 같다. 서로간에 병합도 활발해져서 구분된 영역으로 불리우는 것도 애매한 작품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 예술은 위대하다. 대부분 자신의 테두리를 훌쩍 넘어 경계를 허무는 것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고 고려할 것들이 많아지고 신경이 분산되는 관계로 분절적 논의와 이론과 행동양식에 금방 안주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예술은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세우고 부수고 뭉치고 쪼개어 간다. 그리고 사회가 그것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경외스러운 마음과 허무한 마음이 동시에 인다. 어느날 눈을 뜨면 잡종이 된 그대, 행복한가? 아니면 여전히 그 다음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가? [김지희]
전시장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간 : 2003.5.21 ~ 8.31
전시명 : 올해의 작가 2003 곽덕준 특별전
( * 사진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리플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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