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의 싸나이 이규식, 내 몸 뒤틀린 건 아무것도 아니다

420차별철폐단 연대투쟁국장 이규식, 미안한 마음으로 도움 주고 받으며 살고 싶다


지난 겨울 장애인이동권연대 사무실에서 규식 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자신의 몸집 큰 스쿠터에서 실내에서 타기 쉬운 작은 휠체어로 옮겨 타고 있었다. 벼랑을 오르는 사람처럼 힘들어 보였지만 규식 씨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뇌병변 1급의 그는 한참을 힘들게 시도하다 결국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나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본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영 서툴렀다. 하지만 옆에서 음식을 만들던 여자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규식 씨 몸을 안듯이 안정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선거 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규식 씨를 다시 만났다. 반팔 입은 사람들 틈에서 규식 씨는 한겨울 잠바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하지만 더워 보이지는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26일부터 노숙농성이 시작된 뒤 집에 들어간 날이 7일. 나머지는 찬 거리 위에서 잠을 청했다. 그의 발인 전동스쿠터는 여기저기 망가져 있었고,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리 위에서 가장 빛나게 활약해야 할 420차별철폐단(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기획단)의 투쟁국장이다.

내가 만나 본 그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싸움에 나서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거칠어지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하고, 듣는 것도 (당연히) 싫다. 직책 상 긴장하고 있어야 할 때가 많은데 안좋은 소리를 듣고 나면 힘이 많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안 좋은 소리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안 좋은 소리 하고 싶을 때도 참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저도 나처럼 속 터질 때가 오겠지. 그러면 그때 알겠지."

그래서 그의 신조는 '싸울 때는 싸움만 생각하고 평소에는 조용히 살자' 이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그를 저돌적인 그의 스쿠터와 싸움하고 주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그가 저돌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딴 게 아니다. 싸울 때는 싸움만 해줘야 주위 사람들이 힘을 낸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싸움은 집에서 몇 십년을 보낸 이들을 위한 것

그러나 3월 26일은 투쟁국장 경력 중 가장 가슴 아픈 날로 남아 있다. 동지들에게 뒤로 빠질 때를 알려줘야 할 자신의 중요한 임무를 못해냈기 때문이다. 그날 싸움은 아침 10시부터 시작해 저녁 8시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계속되는 몸싸움에 경찰에 빙 둘러싸였을 때는 이미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뒤였다. 거기에 문화제를 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싸움장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다소 비장한 듯 굳은 얼굴이 떠올랐다. 날서 있는 상황은 얼마나 심신을 지치게 하는지. 그날 문화제에는 자신이 직접 각 대학을 돌며 섭외한 비장애인신입생들이 유독 많이 참석했다. 하지만 자신이 빠질 신호를 내리지 못해 그들은 다 딸려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마음이 너무 아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연행되었을 때 어떻게 하라는 말이라도 해줬더라면 덜 미안했을까... 그는 아직도 그때 기억이 아픈지 계속 자책의 말을 찾았다.

13일 용산 육교 밑 도로점거 투쟁에서 싸움 한 번 해보지 않고 모두 연행돼 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13일 용산 육교 밑 도로에는 버스타기 투쟁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중증장애인들까지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420철폐단은 도로점거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연행과정에서도 아무런 충돌을 만들지 않았다. 3.26 문화제 때 비장애인 전원 연행에 반해 장애인은 10명이나 연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참가자들이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더기로 연행되는 과정을 보며 그들은 자신들의 연행을 목적으로 도로점거에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충돌은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규식 씨는 정확히 빠질 때를 신호했다.

규식 씨는 3월 26일 경찰차에 몸이 반절쯤 들어갔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전경의 화이바를 주먹으로 치며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규식 씨 뒤로는 네명의 경찰이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세종문화회관 주위를 여러바퀴 돌았지만 경찰은 규식씨 스쿠터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가 그렇게 탈출한 이유는 한가지다. 첫날 노속농성을 하기로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 그는 약속했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찰의 감시가 사라질 때를 기다려 새벽 1시 30분부터 3시까지 인근 식당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새벽 3시 약속했던대로 첫 노숙농성을 무사히 시작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새벽 4시가 되자 유치장에서 풀려난 연행경험이 없던 대학생 동지들이 집으로 가지 않고 그가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곳으로 와 주었다. 규식 씨가 26일 이후 7일 밖에 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규식 씨는 일단 연행이 되면 첫끼 식사를 제외하고는 물과 음식을 좀체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중증장애인이 유치장의 변기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규식 씨는 평소에도 소변을 보기 위해 하루 두 번 이상 화장실 가는 일이 드물다. 당연히 물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규식 씨는 바로 코 앞의 세종문화회관 화장실도 이용하지 못했다.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괴롭히기도 많이 했죠"라고 씩 웃고 말아버린다. 빡터지게 얻어터진게 죄라면 죄였을까. 하늘은 파랬다. 비라도 내린다면 물마시기 더 조심스럽겠지.

규식씨는 싸움이 끝날 때마다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결국 다시 거리로 나서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싸움을 보고 장애인을 둔 가족이나 장애인이 몇 십년 동안 장애인을 집구석에만 내버려둔 현실에 대해 뭔가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끝내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식 씨는 열일곱에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리고 스물 일곱 누군가를 좋아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붙잡고 한달을 죽을 것처럼 아팠다. 규식 씨는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나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그 사람을 좋아했을까?"

"장애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밖으로 나오는데, 그때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 해주면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런데 그렇게 처음으로 나오는 나이가 서른 살이 될 수도 있고, 서른 세 살이 될 수도 있어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감정이라는 게 생기잖아요.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 또 많은 감정들이.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보다 너무 늦게 알면..."

규식씨는 또 분명히 그 여자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경석 대표는 그를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이 바꾸리라고 믿는다고 했다. 규식 씨는 평생 그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갈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상대가 자신에게 잘해줘도 함부로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그 태도가 좀 더 성숙한 모습인 것 같다고 했다. 좋아하지 않고 생각만 하려하는 것이. 그 말을 하는 규식씨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비장애인에게 도움 주고 싶다

규식씨는 19살(그의 어설픈 사춘기는 열아홉에 왔다)에 집을 나온 후 물좋고, 산좋은 곳으로만 다녔다. 경기도 일대의 시설을 전전한 것이다. 그러나 후원으로 스쿠터를 얻고 나서 그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탈출하게 되었다.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그는 사육당했다. 아침 먹고 놀고, 점심 먹고 놀고, 저녁 먹고 놀다가 잠자기.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고 했다. 나중에는 그곳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변해버리고 만다고.

그는 사람이야기를 많이 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자신보다 몸이 더 많이 뒤틀려 집을 전혀 나올 수 없는 친구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사람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제때 알아야 할 감정들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박경석 대표 이야기도 많이 했다. 박경석 대표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같이 가자라는 말을 했고 그가 곁에 없었더라면 지금 일을 못 해냈을 것 같다고 했다.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고 싶은 것은 우리의 얼마나 뿌리깊은 욕망이며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인가. 우리의 싸움은 결국 서로 돕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에 대항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장애인이 돈벌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사고 하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보람있는 일을 해서 겨우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사는 세상은 도와주며 사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장애인 싸움도 비장애인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저상 시내버스가 다니면 할머니, 임산부, 아이아빠, 짐이 많은 아줌마들이 얼마나 좋겠느냐고. 몸 아프고, 힘 없는 사람들까지. 장애인들이 좀 더 광장과 지상으로 많이 나오면 그들과 살을 대며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을까.

그와 함께 그가 경찰을 피해 숨어 들었었다는 식당(광화문 일대에서 전동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식당이 아닌 듯 했다)에 가 박영희 대표(장애여성 공감)와 저녁을 했다. 아줌마는 젓가락질이 수월치 않은 그의 밥을 비벼주며 그의 전동스쿠터를 부러워했다. 아들이 몸을 다쳐 휠체어를 타는데 고생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요즘같이 건조할 때는 물이 몸에 좋다며 그의 밥그릇에 물을 한 가득 부어줬다. 그는 그 물을 내려다보다 단숨에 벌컥 다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지나다 털이 북실북실한 큰 개 두 마리를 만났다. 개들이 워낙 커 휠체어 탄 몸과 눈높이가 맞았다. 처음에 개들은 전동기계에 놀랐는지 주춤 물러섰지만 곧 다가와 사람들의 턱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개를 데리고 있던 주인은 개이야기를 한참 하다 농성효과가 좀 있느냐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종로경찰서의 정보과장을 만났다. 그도 저녁을 먹으로 가고 있었다. 박 대표는 진돗개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을 이야기 했고, 개들은 이 사람 저사람에게 침을 바르고 다녔다. 저녁식사 뒤의 해가 지는 포만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뒷골목으로 스며든 평화로운 한때는 늘 그렇듯 손가락 새를 빠져나가듯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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