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말끔히 집안을 정리해놓고 자도 아침만 되면 벌집 쑤셔놓듯 엉망이 되는 집안일... 반찬 한 두개 만드는 것도 벅차해 하는 난 친정 식구들의 구박을 받기 일쑤다. "김서방 보기 민망하다." "언니! 정말 대단하다. 이 집 남자들 정말 불쌍해."... 누구나 하는 집안살림이건만 전업주부 3년차인 내게는 왜 이리도 감당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
은근히 슬미 엄마의 지저분한 집안 살림을 핀잔했던 일.
아침밥 안먹으려는 애에게 숟가락 들고쫒아 다니며 먹이려했던 병규 엄마를 나무랬던 일.
애 머리좀 깔끔히 빗겨서 보내라며 달순 엄마를 구박했던 일.
그 엄마들은 모두 경제적 활동과 가사노동과 육아를 동시에 해냈어야 했던 여성들이었다.
......
그 엄마들 보다 처지가 좋건만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난 위축되어가고 있다. 애 키우는 엄마는 입찬소리 하면 안 된다더니 옛말 하나도 그르지 않다. 초라한 이정표 앞에서도 눈시울을 붉게 했던 그날의 청춘은 이제 아이 손을 이끌고 덤덤한 엄마가 되어 서있다. 먹을 꺼리를 손에 쥐어주고, 목마르다면 가방 속에서 물통을 찾아 부어주고, 햇살이 따가울까 커튼을 쳐주다가 아이가 투정부리면 창문을 열어주는 그런 엄마가 되어있는데, 이렇게 중년을 맞아도 될지 고민하는 아줌마가 되었는데,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벅찬 전업주부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일 앞에 서게 되었다. 아주 오래된 화두 앞에 놓이게된 셈이다.
2003년 9월 4일
쳐박혀 있던 일기장을 찾았다.
진주에서의 고단한 일상이 베어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무엇을 해야되는지 고민 속에 있었다. 진지하게 내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정리하고 싶었는데 낮잠에서 깨어난 송이로 인해 그 진지함은 둔해져 있다. 무언가 잡고 나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다. 상구와 송이의 엄마가 되어있고 상구 때처럼 어린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일할 자신은 안 생기고, 그렇다고 무작정 이러고 있자니 불안하고 하다. 송이와의 소중한 시간들을 만들고 상구에게도 안정감 있는 공간을 주는 것이라 위로해보지만 내 자신에만큼은 불안해지기 일쑤이다.
2003년 10월 14일
약을 먹이면 열이 떨어지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열이 다시 오른다.
겨우 이제서야 잠이 푹 들었다. 어수선해진 방과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아이가 아플 때 아이만 걱정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도 좋다. 애가 아프면 나의 개인적인 모든 고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상구가 어릴 때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가 생각난다. 일하는 엄마 등에 업혀 쫓아다니다 폐렴에 걸려 열흘을 병원 신세졌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미안함, 죄책감, 안스러움...복잡한 감정으로 울면서 입원시켰던 그때를 생각하면 내게서 '일'은 멀게만 느껴진다.
2003년 12월 17일
어떻게 해야할지?
태일씨 말대로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아이들 문제가 정말 자신이 안 생긴다. 송이가 아직 어리고, 작은 몸짓으로 자고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마음이 아프고 용기가 서질 않는다. 한쪽에선 이러 저러한 구상과 계획들을 세우고 부수는데 송이와 상구를 보면 큰 벽 앞에 서는 듯하다. 성남행이라? 새로운 제안에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면서도 어쩌질 모르겠다. 집안에 있으면서 늘 일하는 내 모습을 그려왔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나를 두렵게 한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태일씨는 내게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라고 한다. 그 말은 나도 절실하게 원해 왔던 건데 왜 이리도 홀가분하게 선택 할 수 없는 것일까?
2003년 12월 28일
송이가 하루종일 보챈다.
낮잠도 제대로 안자고 깨서 장난이 아니게 울고 보챈다. 겨우 달래놓고 나니 마음이 약해진다. 머릿속엔 새로운 일에 대한 제안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그 고민으로 꽉 차있다. 배는 더부룩하고, 송이는 보채고, 모든 것이 터질 듯이 꽉 차 있다.
나의 고민과 위축이 사치스러운 건 아닐까?
2004년 1월 9일
송이가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장애가 따르겠지. 드디어 선택은 끝났다. 어떻게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게 아이 돌봄에 있어 진심 어린 마음과 정성과 지혜가 살아나길 노력할 뿐이다.
2004년 2월 18일
성남에 다녀왔다.
이제 집도 마련됐고, 상구 학교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사준비와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준비와 각오가 남았다. 어린이집을 둘러보고 나니 할 일이 두서없이 밀려온다. 3년의 공백을 딛고 잘해낼 수 있을지 약간 두렵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지.
자연은 작은 물줄기에서 큰 강으로 흘러드는데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은 샛강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니와 나와의 인연을 곰곰이 되씹게 한다. 둘 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나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용감해진 걸까? 온전히 엄마로서 아내로서 보낸 시간에서 오는 상실감들이 언젠간 소중한 보약으로 쓰여질 때가 올 것 같다. 여전히 진행되는 암묵적인 회피 - 일과 육아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정면으로 다시 서게 되었다. 거창한 화두가 아니라 내 삶에서 주변의 삶에서 벌어지는 작은 생활을 몸으로 담아보겠다고 다짐해본다. 또 한가지 다시는 일하는 엄마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천천히 가면서 두루두루 살피면서 시작하리라.
주로미 한국보육교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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