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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10시 과거 반민특위 터였던 명동 국민은행 앞에서는 죽산 조봉암 사건 유족 등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의문사건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문사특위)가 주최한 이날 기자회견에는 혁신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과 유족 20여 명이 참석하였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해방 이후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진상은 아직도 은폐·왜곡되어 있다"며 "독재시대 국가폭력의 직·간접적 행위자들은 아직도 기득권을 향유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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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저자 김병진 씨 |
이어 이들은 "국가가 스스로 과거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국가의 책임과 임무는 인권존중과 사회적 불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헌법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국가가 진상규명을 위해 나서라고 촉구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현재 국회에서 추진 중인 과거청산 관련법에 대해서도 "과거청산 관련법이 여야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타협적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며 과거청산 관련법이 원칙을 지켜 추진되어야 됨을 강조했다.
안경호 의문사특위 조직국장은 "4대 개혁법안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는 시점에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건과 사법살인의 피해자, 유족들이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 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음을 인식해 직접 행동해 나선 것"이라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이번 행보의 배경을 밝혔다.
| 국가폭력 피해사건 요약 | ||
<진보당> 1956년 5월에 실시되었던 제3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총투표수 906만여 표 가운데 이승만이 500여만 표를 얻었음에 비하여 조봉암은 216만표를 얻었음으로써 ‘정치적 비중’을 높였고 이승만 정권에게는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1958년 1월 13일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이 검거되어 같은 해 3월 8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김장길 간첩조작 사건> 1970년 동경 엑스포 때 부친의 초청을 받고 도일, 일가친척도 만나보고 관광도 하고 부친으로부터 도장기계와 사업자금을 얻어 귀국하여 사업에 열중하던 김장길씨가 안기부에 현행된 것은 1981년 5월 12이었다. 그때부터 정식 구속영장이 발부된 그 해 6월 25일까지 약 45일간의 불법구금기간 동안에 “변호사에게 조차 한동안 혐의사실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다가 처의 메모를 보고서야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을 정도”의 고문당해 간첩으로 조작되고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반민특위>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이어 9월 특별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바탕으로 활동하였다. 동안 특위의 활동성과는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그러나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과 6·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켰다면,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은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 테러> 1983년 9월 22일 아웅산 테러 2년 후에 일어난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3년 9월 22일 대구 미 문화원 정문 폭파 사건에 대해 당국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9월 22일 21:33경 대구시 삼청동 2가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 정문 앞에서 강력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생인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 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무장 간첩의 소행이라고 판단했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오히려 당국의 조작 사건이라 여겨지나 지금까지 진상이 밝혀지고 있지 않다. <여운형 암살사건> 1947년 7월19일 오후 1시쯤 근로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란 청년에게 피격되어 62세(1886년생)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차 앞에는 트럭이 가로막고 있었고 동행했던 비서가 범인을 쫓자 경찰이 오히려 이를 저지했다. <삼청교육대> 삼청교육은 80년 8월 4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발표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에 이어 '삼청5호 계 획'이란 이름 아래 진행됐다. 이때 검거된 사람은 모두 6만 명이 넘었고, 그 중 3 만9천7백86명이 25개 군부대에 분산 수용돼 이른바 '순화교육'을 받았다. 또한 불 법 체포와 구금, 강제노역과 구타, 살인 등 극심한 인권침해로 부대 내 사망자 52 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백97명, 정신장애 등의 피해를 겪는 상해자가 2천6백 78명(국방부 공식발표)에 이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부 차원의 피해보상은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진상규명은 아직 진행되지 못했다. <남조선 해방전략당 조작사건> 1968년 : 혁신당 통합사건을 남조선 해방당으로 조작하기 위해 남산 중앙정보부로 연행, 권재혁을 주모자로 지목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조작하여 사형 집행. 관련자 김병권, 이일재는 모진 고문을 당한 후 20년 실형 받음. <남조선 민족해방 준비위원회> 1979년 10월 9일 ‘남조선민족해방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은 1960, 7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반외세 민족주의 및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실현하기 위하여 함께 참여한 대표적 사건이다. <이화춘 간첩 조작사건> 1994년 8월 26일 (사노맹 재건사건) 1994년 8월 전북 익산에서 한 농민운동가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봉을 하는 그는 꿀 채밀을 위해 벌통을 싣고 꽃이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4개월만에 집에 돌아온 8월 26일 새벽 6시, 20여명의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리고 20여일이 지난 뒤 안기부는 그를 사노맹 조직원이고, 북한공작원으로부터 사상교양과 공작금을 받고 활동한 간첩으로 발표하였다 이화춘씨는 안기부가 밝힌 혐의내용은 안기부에서 잠 안재우기, 구타, 가족을 구속하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허위자백한 것이라 밝혔다. 특히 육체적인 고문은 버틸 수 있으나 아내까지 간첩으로 구속한다는 협박에 굴복하여 안기부가 요구하는 대로 진술하였다는 것이다.또한 공작금이라고 밝힌 숙부에게 받은 돈은 외환은행으로 버젓이 입금되었음이 드러났다.가장 은밀히 전달되어야 할 공작금이 쉽게 노출되는 은행 송금으로 이루어졌다는 대목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노맹 재건사건> 1995.7-11, 1996.2-5 95년 7월 12일, 민중정치연합 여주, 안산지부 회원 7명이 '사노맹 재건 기도'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속영장에 기재된 '범죄사실'과 공소사실은 재건의 혐의가 아닌 사노맹이 출범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조직원 혹은 조직원 후보로 가입하였다는 것 뿐 재건을 입증할 증거와 활동내용은 전무했다. <간첩단 조작사건> 1980년 5월 3일 : 신귀영, 신춘석, 서성칠 사건 1965년 5월 중순경 원양어선 선원으로 근무하던중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정박하는 사이에 20년 만에 형을 만나게 되었고, 형제들의 결혼식 축의금과 어머니께 드리는 용돈이 결국 간첩혐의로 몰려서,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끌려가 무려 78일동안이나 불법 구금 상태로 죽음 같은 고문을 받음. 1981년 6월 23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 옥살이를 함.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지 두 달 뒤인 1980년 2월에 일어난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은 부산의 신씨 일가 40여명이 연행되어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고, 최종적으로 신귀영씨와 신씨의 사촌매제 서성칠씨가 15년형, 신춘석씨가 10년형을 선고 받음. 서성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수형생활 10년만에 1990. 대구교도소에서 사망함 <우리마당 테러사건> 1987년 8월 17일 88년 8월 17일 오전 4시경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소재 재야문화운동단체인 ‘우리마당’ 사무실에 괴한 4명이 출입문 자물쇠를 뜯고 침입하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던 박정원군(연대)을 각목으로 때려 실신시키고, 채모양을 강간하고 달아났다. 그러던 중 9월 26일 자신을 오부장 테러사건의 제보자라고 밝힌 사람이 정보사령부 우이동 지대장 박철수 소령의 휘하에 있는 박희실 대위팀이 저질렀으며, 현장지휘는 김학두 중사가, 강간은 손영춘 중사가, 남자를 각목으로 친 것은 정모하사가 하였으며 김천연 하사가 현장에 있었고, 나철식 하사는 건물입구를 지켰다고 한다. 또 범행지시는 정보사 파견부대장 이규홍 준장이 직접 했는데 이준장은 ‘강도, 강간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여자가 있으면 손대도 좋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현재까지 그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노맹 합법화특위 신건수의문사> 1994년 5월 2일 숭실대에 입학한 신건수는 90년 가톨릭 학생회 제17대 회장을 지냈으며 91년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연합회 제6대 남부지구장으로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당시 사노맹 합법화 특위에 참여하여 사노맹 합법화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던 1994년 5월 1일 부산 노동절 집회에 동료 1명과 참석하여 사노맹 관련 유인물 1만부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막차 통일호 기차를 타고 상경하였다. 입석으로 기차를 타서 빈자리를 찾아 동료와 헤어진 후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신건수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에 집으로 전화가 와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사체를 확인하라는 연락이 왔다. 신건수는 수색역 근처 군사기지 안 모래무지 위에서 가로로 누운채 머리와 다리에 바퀴 자국이 있는 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었고, 또한 당시 사노맹 유인물을 뿌린 후 기관의 추적이 있었을 거란 추측과 함께 죽음의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민족일보 사건> 피해자의 숫자에서나 그 형벌의 정도에서 해방 이후 가장 큰 언론탄압이라고 할 수 있다. 5.16직후인 5월 19일 폐간의 통보와 함께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 관련자 13명을 구속했다. 소위 혁명재판소는 이들중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1심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민족일보가 혁신계 인사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진보적인 주장을 펴고 있던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의 기사내용이 당시 북한의 주장과는 다른 논조가 많았고 오히려 당시 혁명세력이라 주장했던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군사정권은 부분적인 논조를 끄집어 내어 용공으로 단정짓고 엄청난 형벌을 부과하였다. <보안사 사찰관련 김병진> 김병진씨는 1983년 연세대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재일유학생 위장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은 뒤 검찰의 공소 보류 조치로 보안사 군무원(대공처 정보분석반)에서 강제로 근무하게 됐고 1985년 11월 공소보루 조치가 해제되자 1986년 2월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일본에서 1988년 간첩조작 내용 등과 관련된 ‘보안사’논핀셕을 아사히신문에 게재했고 이 내용은 한국에서 ‘보안사’라는 책으로 출간됐으나 5공 정권에 의해 바로 출판금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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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저자 김병진 씨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