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부시와 케리를 잊어라

미 제국주의가 원한 것은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강력한 지배자
세계 경찰국가 지위 스스로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

언론은 어제 하루 종일 미 대선 상황을 실시간 생방송했다. '신만이 결과를 안다'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박빙의 승부라고 보도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미칠 미국의 대외 정책, 세계 정세 전망을 짚는 각종 인터뷰, 좌담, 분석 등이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 미국 국민은 공화당과 부시를 선택했다. 언론들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미국의 유권자들이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 미국이 보수적으로 유지되길 원했고, 테러와 맞서 싸우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고 입을 모았다. 신보수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힘의 크기도 보여주었고, 부시와 케리 후보의 캐릭터에도, 재정정책이나 감세, 낙태, 의료보장 등 각종 정책의 차이도 들춰가며 다각적인 뉴스를 제공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쏠린 세계의 이목, 그것은 이미 미국 대선이 한 국가의 뉴스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 제국주의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유럽, 중동, 아시아 등 세계 각 국가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자국에게 미칠 직·간접적인 영향을 분석하며 타산을 맞추며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세계 질서에서, 국제 정치 무대에서 미 제국주의가 갖는 힘의 세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장면들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정치 한마당, 거기에는 오직 부시와 케리만 있었다. 부시와 케리 외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고 아무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부시냐 케리냐, 케리냐 부시냐만 있었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는, 미국의 정당과 미디어는 그 누구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 심지어 미국에 의해 발생한 문제들도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부시와 케리가 수차례 진행한 TV토론에서 이라크, 이스라엘, 북, 그리고 유럽, 남미에 대한 대외정책과 경제, 세금, 의료보험, 사회보장, 낙태 등이 주제로 다루어졌지만, 본질 차이 없는 말싸움으로 일관했다. 몇 가지 부분적인 정책적 차이를 제외하면, TV토론은 결국 누가 더 미 제국주의를 잘 유지 강화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선명성 경쟁의 장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세계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전쟁, 기아, 빈곤, 인권, 환경 파괴 등 인류의 문제는 처음부터 그들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심지어 미 제국주의에 의해 직접 피해를 당하고 있는 제3세계 민중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한편 미국에서 케리에 비판적 지지론을 펼쳤던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운동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부시가 아니면 누구라도', '1분만 지지하자'며 비판적 지지론, 조건부 지지론을 펼쳤던 미국 노총을 비롯한 운동 진영들은 결국 미국의 세계 지배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민중들의 기대도 져버린 셈이다. 10월 17일 백만 노동자 대행진의 실패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조직했던 미국의 반전운동, 민중운동은 상당한 후유증이 불가피할 것이다. 미국 반전운동은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세계 반전운동의 의미있는 활동을 펼쳐왔는데, 이번 대선 공간에서 유의미한 실천을 전개하지 못함에 따라 향후 전망 모색이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부시냐 케리냐 하는 것은 오직 미 제국주의의 집행자를 누구로 내세우느냐 하는 미국만의 관심이자 미국만의 선택이었다. 앞으로 일방주의 노선이 바뀌냐 안 바뀌냐, 대외 정책이 변하느냐 안 변하느냐를 따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무엇이 바뀌겠는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믿는가. 그 기대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부시든 케리든, 미 제국주의가 세계 질서를 관리할 경찰국가로서의 일방주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듯 말하고 다녔다. 전쟁과 침략을 본질로 하는 신국가안보전략의 골격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미 제국주의가 임의로 지목한 '악의 축'을 향한 공격과, 임의로 지정한 테러와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말도 아무 데도 없었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향한 폭격도, 북에 대한 위협도 계속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를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강조한 후보는 오히려 케리였지 않았던가. 미국은 새로운 정책을 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책을 강행할 새로운 지배자를 원했다. 선거를 통해 부시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게 되었고 바뀐 것은 없으며,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부시와 케리만 등장한 미국 대선, 그러나 그것은 미 제국주의가 연출한 일시적인 특집드라마일 뿐이다. 역사의 시나리오는 미국의 선거로, 부시와 케리의 승부로 구성되지 않는다. 미 제국주의가 펼친 환각적인 미디어 정치,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지만, 언제까지고 세계 민중의 이성과 상식과 보편의 열망을 가두어 두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시급히 환각에서 벗어나 역사의 주연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정치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부시가 이기길 또는 케리가 이기길 바라던 일말의 모습이 있었다면 시급히 정정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폭격을 피해가며 반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민중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초국적자본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는 세계 민중들, 이들이 진정한 주연이다. WTO를 타격하고, 무역협정을 반대하고, 반전공동행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세계 민중의 투쟁, 베를린 반전총회와 유럽사회포럼의 결의에 이어 5차 세계사회포럼을 준비하는 주체들, 저항의 국제적 연대와 일국의 모든 반자본 투쟁들, 이 연대와 저항의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민중이 진실로 역사를 써내려갈 주인공이다.

오늘날 미 제국주의의 독선, 독주, 독재에 맞서는 유일한 힘, 그것은 세계 민중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에서 나온다. 주연은 부시와 케리가 아니다. 미 제국주의라는 괴물과 그에 맞서 싸우는 세계 민중이다. 부시와 케리를 빨리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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