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ARS 모금 전화, 이런 저런 운동의 이름으로 수많은 민간단체들이 동원하는 이웃돕기 성금과 자원활동, 기업들이 사회환원이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구호활동은 오늘도 수많은 아이들을 '수혜자'로 만들고 있다. 모든 국민의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법률은 밀가루 한 포대를 1인 가구 37만원의 급여로 바꿔놓았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리고 있다. 노동 3권 같은 건 꿈꿀 수 없고, 노동조건에 대해 뭐라 할 수 없고, 단지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 한다니, 이들에게 '노동'은 권리가 아니라 '고통'이다.(노동은 라틴어로 일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먹지도 못할 '파이'를 열심히 키웠는데, '경제성장'을 했는데, 소위 '국부'를 키웠는데 대다수 사람들의 박탈상태가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대한민국 헌법 제 34조)에 대한 국가의 노골적인 회피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권리"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혜적인 차원에서 국가가 선발한 빈곤층에게만 혜택을 '베푸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권'이 인권이란 생각을 전연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사회가 옛날 생각, 구시대의 이념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는 뜻이다.
'옛날 생각'에서는 국가는 간섭을 하지 않고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즉 '경제활동의 자유'를 인권의 제일선으로 보장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노동자가 중심인 민중에게 비인간적인 생활상태를 강요했다. 철저한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임노동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육체적 파멸 및 정부의 방임을 그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방임은 노동자 편에서는 방임이었지만 자본가 편에서는 결코 방임이 아니었다. '계약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의 보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의 단결이나 쟁의행위를 법률로 금지하고 형벌로 처벌했다. 노동자에게는 선거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산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경제적 자유만이 아닌 다른 여러 자유(정치적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보장받는 것은 '이권'의 자유로운 추구였고, 침해받는 것은 다수 민중의 '인권'이었다. 구체적인 인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형식적인 인권 체제 속에서의 자유는 '굶어죽을 자유'를 내포한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물론 인류는 이러한 인간소외의 현실에 맞서 실질적인 생존권을 확립하려는 격렬한 투쟁을 했다. 시장에 대한 일정한 개입 혹은 시장의 극복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입법을 요구하고 실질적 평등의 확장을 외쳤다. 경제 활동의 자유가 아닌 정신활동과 신체의 자유를 강화하는 것, 시민의 권리 행사를 가능케 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 압제에 대한 봉기를 인정하는 것, 형식적인 대의제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들불처럼 번졌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들이 '사회권'(일반적으로 사회권에는 생존권, 교육을 받을 권리, 노동의 권리,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여성·아동에 대한 보호 등이 포함된다)의 이름으로 인권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처럼 인권은 성립기의 한계와 모순을 깨치고 발전돼 왔다. 그렇게 발전된 인권에는 '사회권'이 당연히 포함되며, 사회권으로서의 인권이야말로 인간의 현실을 반영한 정직한 개념이다. 자유란 인간적인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절실한 것이며, 궁핍한 인간은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권리도 차단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권은 사회권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 새로운 권리는 국가의 방임이 아니라 분배의 정의를 이루려는 국가의 간섭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헌법과 제도로서 구체화되었다.
불안정 노동과 빈곤, 왜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1. 보편성의 힘을 생각하자
'인'권을 기타의 '권'리와 구별하는 우선적인 특징은 그 보편성이다. 인권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이 '타고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경제적·사회적 힘관계를 적극적·실질적으로 고려에 넣고 인권의 보편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권의 보편성은 허황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말만으로 '보편적'이라 선언된 인권을 재산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권의 역사가 논증하듯이, 보편성을 위한 투쟁과 그 실현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동권 확보를 위한 운동에서 여성해방 운동까지, 노예제 폐지와 민권운동에서 반식민지 투쟁까지, 압박 받고 배제된 이들은 어디에서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한 투쟁의 무기로 보편적인 인권의 언어를 움켜잡았다. 이들은 그 당시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상상하는 자유 이상의 것을 그 권리의 내용에 포함시켰고, 스스로 그러한 권리를 쟁취하려 했고, 그 권리들을 목적 하에 두었다.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열망(인간해방의 의지)은 입발림을 걷어치우고 참되게 보편적인 인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2.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인권침해로 규정해야 한다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침해당한다면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개발을 이유로 집에서 내쫓기거나, 일자리를 잃을 때는 국가의 책임을 말하기 이전에 가난의 불가피성을 탓한다. 자유의 박탈의 대해서는 끔찍하게 여기며 몸서리치지만, 건강권, 주거권, 노동권 등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부정당함으로 인한(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너그러움을 보인다. 이런 태도는 사회권의 침해를 인권목록에서 떼어놓는 힘이 돼왔다.
모든 인권은 그에 부응하는 의무, 문제삼는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하고, 이행할 의무를 포함한다. 사회권의 침해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거나 유감의 표현으로 침묵하는 일을 그만둬야 인권이 제대로 보일 수 있다. 지금은 명확하게 보이는 시민·정치적 권리와 관련된 기준을 규범화하던 초기 시절에도 마찬가지의 반대와 어려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사회권 침해에 대해 '막연하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벗어나서 '인권문제'로 삼아야 한다. 국가가 사회권의 실현을 위한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보편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저기준을 설정하도록 하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이행을 했고, 목표를 성취했는지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3. 잠재적 침해자들을 감시하는 힘
앞에서 말했듯이 인권에는 그에 부응하는 의무가 있다. 사회권에 대한 의무자이자 잠재적 침해자들의 목록은 국가를 넘어 확대된다. 사회권의 향유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실체를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잠재적 침해자들은 국가와 공적 행위자, 비국가 행위자(예를 들어 기업), 국제재정기구와 기타의 기구들, 초국적 기업, 국제사회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권침해와 연루된 국제재정기구들의 프로젝트, 사회권을 지지하는 입법과 정책을 폐기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일 등에 대해 맞서야 한다. 사회권의 잠재적 침해자들이 국제적이라면, 인권의 주장 또한 '국제적 힘'을 가진다는 점을 잊지 말자.
4. 연대성의 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은 사회권 침해의 잠재적인 피해자이다. 인권의 언어를 통해 다양한 의제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로 모여야 한다. 특히 노동기본권과 사회보장의 권리는 나는 일할 수 있고, 너는 일할 수 없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요구에 관한 문제이므로 통일적으로 제기돼야 한다.
5. 사회권의 요구는 인권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에 기반한 것
모든 인권은 상호의존하며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자유권과 사회권을 나누어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은 인권을 아예 생각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어야 분배가 있는 것이지, 경제발전을 하다고 해서 사회권이 곧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유를 위한 투쟁은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인권의 범주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자유권은 일차적이고, 즉각적이며, 사법적으로 보장되는 권리라고 보고, 사회권은 이차적이고, 점진적이고, 사법적 판단이 불가하다는 기존의 접근틀은 깨져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사회권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자유권을 잘 보장하겠다는 취지도 아니다. 현실의 투쟁 속에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6. 자선이 아닌 인권의 힘
인권의 주장을 통해 구걸하는 거지 또는 수혜자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인권은 자선이 아닌 의무를 요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권이 갖는 가장 큰 힘이다. 권리는 일종의 '절대성'을 갖는다.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아니라, 인권이란 그것 없이는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할 수 없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권리의 주체가 '그것에 대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선언할 때 그 권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권리가 실제로 행사될 수 있는 지반이 형성될 수 있다. 인권이란 현재 법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이고 가능해야만 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위'로서 '가져야 한다'의 문제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을 통해 대항력 있는 힘을 만들고, 그 권리를 보장하고 이행할 의무자의 책임성 부재를 지적하는 일, 장식용처럼 여겨지는 사회권의 규범을 직접 적용하는 일은 사회권의 주체들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미디어참세상 + 불안정빈곤공동행동 공동기획 : 사회적 빈곤에 철퇴를
1회 -'사회적 가난'의 자화상 : 가난은 예외적인가?(10월 29일)
(기고)사회적 빈곤, 사회 파괴 기계로 작동하는 현실 (사회복지와노동 포럼팀)
(취재)"800만 빈곤층 불안정노동의 결과" (김삼권 기자)
2회 - 빈곤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인권침해'(11월 3일)
(기고)"인권의 주장을 통해 수혜자가 아닌 권리주체로" (류은숙)
(취재)통계로 본 빈익빈 부익부(김삼권 기자)
3회 - ‘가난’의 관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허와 실(11월 17일)
4회 - 자본금융화의 ‘폭력적 희생자’-신용불량자(12월 1일)
5회 - ‘가난’의 여성화, 여성의 빈곤화(12월 8일)
6회 - 사회연대기금, 노조운동의 활로인가? 늪인가?(12월 15일)
7회 - 기업의 사회공헌, 기부운동의 실태, 과연 아름다운가?(12월 22일)
8회 - 가난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자(12월 29일)
- 덧붙이는 말
-
류은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로 일하고있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