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여야대타협과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폐지, 여야대타협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기
여야대타협 이루어진 '민생법안'에 경각심을

어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 국가보안법 연내 처리 유보 발언이 있은 후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다시 정국의 소용돌이가 거세지고 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법사위에 상정된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연내 처리 유보와 함께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민생과 개혁을 동시에 살리기 위한 여야 대타협'을 제안했다. 비정규법안에 이어 '유보 전술'로 아주 톡톡히 재미보고 있다. 6일부터 단식을 시작한 300여 명의 단식농성단은 경악과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농성자들은 어제 오후 열린우리당사로 이동, 긴급 기자회견과 규탄대회를 가졌다.

오늘 아침 열린우리당은 확대간부회의를, 한나라당은 의원총회를 각각 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주요 사안에 대한 당의 입장을 발표했다.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열린우리당이 국보법 유보가 아니라 폐지 당론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임시국회를 열자는 것은 4개 국론분열법을 날치기하기 위한 장을 만들려는 책략이므로 협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대타협 제안을 한나라당이 거부를 했다며 한나라당의 태도를 비난했다.

이로서 몇가지 분명해지는 게 있다.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게 확인된다. 당의 지지기반을 모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유효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다. 소수 당내 완전폐지를 주장하는 의원이 있기는 하나 그 숫자와 관계없이 열린우리당은 이해득실에 따라서만 이를 다루고 있다. 더군다나 나머지 3개 개혁법안의 내용적 타협과, 이미 두 당의 합의가 이루어진 법안들을 한번에 처리할 수 있다면 국가보안법 폐지는 뒤로 미뤄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을 처리할 능력과 의사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야대타협' 문제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립은 매우 적대적이고 극한 대치를 보이는 것 같지만 본질과 계급적 속성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지난 3일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이한구 정책위원장은 "상임위 운영시 극단적인 대립법안은 우선 접어두고 상호합의 가능한 법안부터 빨리 처리해야 된다. 상호 합의 가능한 법안을 우선으로 부지런히 처리해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정부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국면 전환의 미끼를 던진 바 있다. 열린우리당이 이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근 떨어지는 당 지지율에 다수로 밀어붙이는 것이 반드시 득이 되지 않는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다만 지지세력의 이탈을 막아낸다는 수준에서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액션을 취할 것이다.

여야대타협은 서로 적대하는 두 세력간의 계급적 공조의 성격을 띤다. 이른바 80개 또는 800개라고 말이 오가는 대부분의 '민생법안'들은 이미 상임위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요식 절차만 남겨놓고 있다. 이들 법안 중에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법안들이 줄비하다는 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당장 오늘 오후에만 4개 상임위 전체회의와 6개 소위를 열어 새해 예산안 등 관련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국방위는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을, 행정자치위는 어제 여야간 이견을 좁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또 본회의에서는 기업도시건설특별법안과 신행정수도후속대책및지역균형발전특위구성안 등을 처리할 예정이다. 이밖에 공정거래법과 뉴딜 관련 투자3법(기금관리기본법, 국민연금법, 민간투자법), 경제자유구역법개정안 등도 줄줄이 상정되어 있다.

정국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 극한 대치로 나아갈 수도, 임시국회 개최 여부에 따라 진정국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대치냐 진정이냐는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다. 극한 대치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법안의 이해를 둘러싼 양 당간 줄다리기일 뿐이고,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주요 법안에서는 이미 여야대타협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형법 대체를, 기타 3개 개혁법안도 내용에 있어 훨씬 후퇴한 것이어서 개혁 거론조차 민망하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마당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열린우리당에 맡겨두어야 하는 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올해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이 땅 모든 민중의 바램이다. 그러나 단식농성자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염원하는 다수 민중의 뜻과는 상관없이 열린우리당은 정쟁의 수단으로서만, 개혁세력의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한다. 연내 폐지가 우리 모두의 소망이지만, 그들의 손을 빌려 폐지해야 하는지, 폐지하고도 그 정신이 온전히 살아있는 형법 대체를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지도 반드시 되짚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이미 제 수명을 다했다. 국가보안법이 단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법이어서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기 위해 피흘리고 신음하며 싸워왔던 민중의 저항이 그렇게 만들어왔다. 공안이 체제 유지와 정권 사수를 위해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흉기를 휘두를 때 이 땅의 민중은 단 한 차례도 그저 당하고 있지 않았다. 국보법의 그물이 씌어지면 바로 성명서를 조직하고, 연대를 조직하고, 관련 대공분실과 경찰서를 항의방문하고, 면회투쟁을 이어가고, 모금을 하고, 구출투쟁을 벌이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진행했다. 법정에 선 피해자의 당당한 발언은 민중운동의 뉴스가 되고, 수감된 투사가 쓴 편지는 보는 이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모든 투쟁은 우리 사회 진보를 위한 소중한 무용담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 여부가 여야대타협의 세트물로,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결코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온 방식 그대로 마지막까지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순전히 그 결과로서만 국회에서의 폐지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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