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출발점

민주노총은 남북교류협력기금 덥석 물지 않아야
더디 가도 남북 민중 스스로 아래로부터의 통일 열기를

북은 미국이 북 정권의 교체를 목표로 한다고 믿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미 부시 행정부가 거듭되는 대북 위협과 적대정책을 펼쳐왔고, 지금도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북핵 논의 과정에서 수시로 적대적인 발언을 해온 것에 기인한다. 한편 북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민족자주·반전평화·통일애국이라는 3대 민족공조를 강조하고, 한국의 대북특사 수용, 제15차 장관급회담 조기 재개 등 그동안 지속된 남북관계 경색의 돌파구를 마련할 의사를 내비쳤다.

이런 가운데 지난 11일부터 14일까지 미국 의회 하원대표단이 북을 방문했다. 하원대표단의 웰커트 웰든 미의회 하원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번 방북은 6자회담 절차 재개에 초점을 맞췄다. 북 지도부에 대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악의가 없으며 북한의 체제 교체를 원하지 않고 선제공격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전했다"고 밝혔다.

웰든의 보고만으로 6자회담 재개 여부와 부시 행정부의 대북 태도가 바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하원대표단의 발언처럼 오는 20일 부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선제공격과 적대정책 발언 대신 6자회담 개최와 평화적 북핵 해결을 시사하고, 남한과 북이 3대경협을 포함한 실질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하게 된다면, 올해 한반도 정세는 긍정적인 가운데 가파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노무현정권은 올해 남북경협에 속도를 더하는 한편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북의 지도부를 국제사회로 끌어낸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한 축으로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진전시킴으로써 11월 부산에서 치러질 APEC 정상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획기적인 정치적 이벤트를 구사한다는 계획이다. 상반기 안에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고, 6·15 남북 정상회담 5돌, 8·15 해방 60돌 등 역사적인 행사를 함께 치르면서 관계 개선의 계기를 확보한 뒤, 지금까지의 남북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합의와 실천을 전개한다는 시나리오다.

통일부가 16일 밝힌 남북교류협력기금 출연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통일부는 남북협력기금 출연금 5천억 원을 포함해 5천943억2천100만 원을 올해 예산으로 내놓았다. 작년 2천662억7천200만 원에 비해 3천280억4천900만 원이 늘었다. 개성공단 사업지원단 운영비 7억1천700만 원과 남북경협협의사무소 운영비 5억1천만 원을 올해 새롭게 책정해 개성공단을 통한 남북관계 활성화에 주력할 계획이다. 여기에 장관급회담 4회, 군사회담 2회,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4회, 경제협력실무협의회 10회, 사회문화회담 4회 개최를 전제로 20억3천300만 원을 남북회담 운영비로 책정해 놓았다.

한편 열린우리당은 지난 주 기업이 남북교류협력 회사에 출자한 부분을 출자총액제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출자대상 회사에서 남북경협 관련 자산 또는 매출액이 전체의 25%를 초과하면 해당 회사에 대한 투자분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정부는 연초에 국내 민간기업이 북한의 항만·통신·전력·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조성에 투자할 경우, 총사업비의 80%를 남북협력기금에서 대출해 주기로 하였다. 이 모두가 자본의 대북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조처들이다.

오늘날 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헤아려볼 때,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한반도 전쟁 위기 해소 흐름이 이어진다면 남북 민중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치적 화해 무드와 함께 3대경협을 포함한 교류와 대북 투자의 확대는 본질적으로는 경직된 자본에게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올해 자본 연구기관들은 하나같이 한국 경제가 3%대의 저성장율을 보일 것이라 예고하고 있고, 외적 요인의 변동에 따라서는 작년보다 불황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고용 불안과 비정규직 확대로 사회안전망의 붕괴 위기가 제기되는 데다, 정부가 여러 법적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투자 규모는 기대에 미치지 않고 있다. 따라서 3대경협을 비롯한 대북 투자의 확대는 자본에게 획기적인 활로를 열어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총은 지난 14일 올해 제1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2006년까지의 주요사업 방침을 심의, 오는 20일 열릴 대의원대회에 제출하고 있다.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2005년 사업계획안에서 "4대 집중투쟁 과제를 쟁취하여, 계급적 단결과 대표성을 강화하고 민중복지예산 확보를 통해 신자유주의·세계화 정책기조를 바꿔내고,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에 기여한다"는 투쟁전략을 밝힘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실천에 무게를 실었다.

민주노총의 2005년 사업계획은 대의원대회에서 최종 결정될 것이지만, 상정된 많은 안건 중에 '고용보험과 국가예산 확보 및 남북교류협력기금 사용 건'이 눈에 띤다. "민주노총에서는 2005년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다양하고 폭넓은 남북교류사업을 전개할 예정"인 바 새해맞이 철도기행, 남북노동자대표자회의, 5.1절 남북노동자대회, 6.15 공동선언 5돌 기념대회, 8.15 광복 60주년 기념대회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일상적인 통일운동 사업비는 예산에서 지출"하되 "규모가 크게 전개되는 남북노동자 교류사업에 대해서는 통일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한 남북교류협력기금을 사용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노동자의 다양한 실천을 기획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강조하기에 앞서 이 실천 기획이 궁극적으로 남북 민중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가 하는 점을 꼼꼼히 짚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누구보다도 발벗고 나사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사하는 세력은 집권세력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은 신자유주의 유연화와 동북아 지역의 자본시장의 확대 재편을 목표로 한 자본의 기획과 정확히 맞물린 평화와 번영 프로젝트를 실행시키고 있다. 통일부가 내놓은 6천억 원에 가까운 남북교류협력기금의 속성도 여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남북교류협력기금 사용 문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적 차원에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마치 눈먼 돈인 마냥 손에 잡힌다고 덥석 물어버리는 우를 범하면 곤란하다. 민주노총이 투쟁전략에서 스스로 밝힌 것처럼 "신자유주의·세계화 정책기조를 바꿔내고,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신자유주의·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는 노무현정권의 기금을 받아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 운동을 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이는 논리적 모순에 그치지 않고 향후 민중운동의 발전의 맥락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문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자본과 지배세력의 구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더디 가도 남북 민중 스스로가 아래로부터의 통일 열기를 모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곧 미 제국주의의 적대정책과, 그와 동맹을 맺고 있는 노무현정권, 그리고 한반도를 무한 경쟁의 시장 질서로 재편하려는 초국적자본의 운동을 저지하는 가운데 남북 민중의 다양한 연대의 계기와 실마리를 찾아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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