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살인의 추억>으로 우리에게 깊이 각인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흥행몰이가 심상치 않다. 개봉 8일 만에 4백만 관객을 훌쩍 넘은 데다가 예매율도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영화 최고의 관객동원도 가능하리란 분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관객들의 엇갈린 반응까지 호재로 작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괴물’의 사전적 정의는 “매우 추하고 무섭게 보이는 거대한 상상의 존재”나, “매우 큰 어떤 것, 특히 다루기 불편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어떤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어를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잔인하고 무서우며 사악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요즘엔 뜻이 조금 바뀌어 긍정적인 면도 지적되고 있다. ‘한화’의 괴물신인 류현진 투수 같은 식이다.
영화 <괴물>은 강렬하고 짜릿하게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곁을 흐르고 있는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이 극대화된 표현이다. 그것은 미확인비행물체(UFO)처럼 갖은 억측과 소문을 양산하면서 급속도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봉준호의 괴물은 기존의 괴물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다.
괴물의 실체를 ‘생각’하다
1993년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에 등장한 ‘티라노사우루스’, 1998년 에머리히가 만들어낸 ‘고질라’ 혹은 피터 잭슨이 2005년 새롭게 선보인 ‘킹콩’이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속 괴물이다. 이들 괴물은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며, 문자 그대로 ‘괴물 자체’에 머물러 있다. 관객은 그것들의 등장과 사건진행 및 결말을 특수효과에 따라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봉준호가 만든 괴물에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괴물의 발생원인은 1954년 일본의 혼다 이시로 감독이 처음 생각해낸 ‘고질라’의 출현과 유사하다. 혼다 감독은 태평양에서 실시한 수폭실험으로 인해 방출된 엄청난 방사능으로 거대생물 고질라가 탄생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름도 없는 봉준호식 ‘괴물’의 출현배경은 이 땅의 사회-정치적 불평등이다.
강자들이 시키면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예속관계가 영화 첫머리에 프롤로그처럼 등장한다. ‘맥팔랜드’가 포르말린을 한강에 방류하라고 명령하는 원인은 그가 싫어하는 ‘먼지’가 병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정말 해괴한 논리다. 물에 희석되면 그만이란 대꾸는 미군이 30년 전부터 ‘알래스카’ 청정수를 공수해서 먹고 있기 때문 아닌가.
봉준호는 거기서 괴생물체의 발생단서를 포착한다. 미군이 장기 주둔했던 기지를 반환하면서 각종 오염실태와 수천억 원대의 복구비용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영화 <괴물>이 개봉됨으로써 봉 감독은 적시안타를 때린 셈이 됐다. 덕분에 관객들은 구겨진 자존심과 어처구니없는 한미관계의 우울한 실체와 우리의 대응자세를 자꾸 되새기는 계기와 만났다.
영화감독들의 자유자재한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외국의 괴수영화를 보았던 관객들은 영화 <괴물>에서 단순한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보고 즐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반추하며 추론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진화한다. 생각하는 행위를 약화시키는 전략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언어와 행동이다. 만약 <괴물>이 ‘생각’에 역점을 두었다면 객석은 상당히 썰렁했을지도 모른다.
결말이 허무하다고?!
영화가 끝났는데 일부 관객들은 자리를 일어설 줄 모른다. 무엇인가 미진하고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현서는 죽었는데, 거지소년 세주는 어찌 살았나?” 혹은 “새끼들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라든가 “괴물은 죽은 게 아니고, 얼어붙은 강물 아래 살아 있는 거 아냐?” 하는 수군거림이 들린다. 그들은 감독의 자상한 설명이 듣고 싶은 모양이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박희봉 가족은 모두 문제 있는 사람들이다. 희봉과 강두와 현서 삼대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그들은 결손가정의 구성원이다. 남일과 남주 남매도 독특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관심은 강두와 소년의 관계설정에 모아져 있다. 이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허무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강두는 아버지와 딸을 잃었다. 눈 오는 한강둔치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그에게 동생들의 안부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괴물이 퍼뜨렸을지도 모를 ‘바이러스’에 대한 소식도 그는 안중에 없다. 얕은 잠에 빠져든 세주를 깨우는 강두의 모습은 영락없이 아빠의 그것이다. 세주는 애초부터 고아였고, 강두도 이제 고아나 다름없다. 여기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
강두는 아버지 없는 한강변 매점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두렵다고 해서 삶의 터전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처지다. 세주는 현서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소중한 존재다. 결손상태는 지속되고 있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거의 유일한 방도는 그들끼리 보듬는 것이다. 최소한도의 희망과 구원의 전갈이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 담겨져 있는 셈이다.
낮지만 단호한 비판의 목소리
휴대전화로 현서의 생존을 알게 된 강두가 경찰에게 위치추적을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고 또 빈다. 국가공권력의 핵심인 경찰은 강두를 미친 인간으로 생각한다. 강두에게서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임무를 띠고 찾아온 의사도 마찬가지다. 마취가 되지도 않은 사람의 이마를 생짜로 드릴로 쪼아대는 그들과 밖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가든파티 즐기는 미국인들.
영화 <괴물>은 이런 장면들을 하나하나 예비하면서 왜 강두일가가 고독하게 괴물과 사투를 벌어야 했는지 보여준다. 딸과 손녀와 조카를 잃은 그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위로를 받지 못한다. 외려 그들은 위험 바이러스 보균자나 미치광이로 취급된다. 출구가 막힌 가족의 선택은 스스로 무장하고 실종된 현서를 찾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문제는 그들의 소외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탈출과 무장을 위하여 희봉이 접선한 인간들과 위치추적을 위하여 남일이 만난 운동권선배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끝을 모르는 탐욕은 그들을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경제 만능주의와 한탕주의가 오염시킨 우리사회의 쓰라린 현주소를 봉준호는 과장하지 않고 절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올 한해만 22조 6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쓴다는 국방부가 고질라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치도 않은 괴물 하나 처치하지 못한다는 발상 저변에는 국가권력에 대한 깊은 불신과 비판이 깔려 있다. 국방부 일손을 덜어주는 (?) 미국 특수 방역부대의 허접한 활약에 대한 비아냥거림도 신랄하다. 해결능력도 없이 문제만 벌려놓고 허우대만 요란한 그들!
강두가족을 둘러싼 사회관계는 하나같이 폭력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 (경찰과 의료진), 돈에 눈먼 인간들의 폭력적인 탐욕 (흥신소 직원들과 운동권 선배), 괴물퇴치보다 강두가족 추적에 열중하는 황당한 공권력 (경찰과 군대), 대한민국 공권력의 배후에서 그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폭력의 제공자이자 그것의 본산 (미국). 이런 폭력의 고리가 괴물과 함께 스멀스멀 기어 나와 각자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 괴물과 우리 안의 공포
봉준호가 만들어낸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괴물’이라고 불린다. 이름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수단이다. ‘신’의 존재증명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이라는 어휘의 존재와 활용이라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무수하게 다양한 ‘신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모든 신들에게는 나름의 구체적인 이름이 있어서다. 하지만 한강의 괴물은 무명이다.
왜 그럴까? 영화 <괴물>을 본 관객들에게 괴물은 관객수효만큼의 표상과 개념과 이미지와 추억으로 남는다.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았기에 괴물은 그 정도로 허다하고 다채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괴물은 실존하는 구체적인 생명체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정치적인 관계들이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는 현상이자 본질이다.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에서 발생한 무명의 괴물은 우리들 내부에 늘 존재하는 불안과 공포와 사회적 억압의 구체적 현현체이다. 언제나 잠복해 있으면서 기회만 되면 밖으로 튀어나올 만반의 준비를 갖춘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특수한 기제로 괴물은 존재한다. 영화 <괴물>에는 그래서 매우 상이하고 이질적인 해석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우리는 ‘화성’ 연쇄살인과 그것이 발생했던 시기에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전역에서 자행되었던 각종 사회폭력과 국가폭력을 보면서 전율했다. 무력한 몇몇 개개인에게 행사되는 연쇄살인범의 폭력과 다수 국민과 사회제도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의 실체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영화 <괴물>은 <살인의 추억> 연장선 위에서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인간들의 소외와 물리적 폭력의 실체를 까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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