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2일 "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이루는 작은 밀알이 되겠다"며 대선 불출마와 탈당을 전격 선언했다. 대선 주자로서 김근태 전 의장의 지지율은 1-2%대에 머무르지만,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최대지분을 가진 인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통합 기적 이루지 못하면 수구냉전세력에게 권력 자진헌납"
김근태 전 의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여권의 현 상황에 위기감을 토로하며, 시종일관 '대통합'을 강조했다. 표면적으로 이번 김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구여권의 통합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구여권의 통합 작업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각 정파들이 각계약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김근태 전 의장은 이날 "6월 한달 동안 대통합의 기적을 이루지 못하면 평화개혁세력이 상처입고 분열된 채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다"며 "절박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대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수구 냉전세력에게 자진해서 권력을 헌납하는 일"이라며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사회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전 의장은 "민주개혁세력이 직면한 엄중한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며 "지금 이 순간부터 온 몸을 던져서 민주개혁세력의 분열을 막고, 실패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근태, 정동영 등 대선 주자들에게 '오픈프라이머리' 제안
김근태 전 의장은 이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분명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그 장이 바로 완전한 국민참여경선, 오픈프라이머리"라고 통합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이어 그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 정동영 전 의장, 이해찬 전 총리, 천정배 민생정치모임 의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구여권의 대선 예비 주자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국민경선제 참여를 호소했다.
김 전 의장은 또 "빠른 시일 안에 오픈프라이머리를 통해 한나라당과 다른 미래 비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부족했던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실행계획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능성 희박한 '정치적 실리' 대신 '정치적 명분' 선택
김근태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앞선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그것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앞선 두 주자의 경우 사실상 구여권 내에서 실질적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김근태 전 의장은 열린우리당 내 최대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민주평화연대(민평련)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특히 구여권 내 대선주자들의 여론지지율이 1-3%대의 고만고만한 선에서 머물고 있어 김 전 의장의 가능성은 열려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구여권의 대선후보가 된다'와 '대통령이 될 수 있다'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김 전 의장이 구여권의 대선 후보가 된다손 치더라도, 한나라당 '빅2'를 물리칠 대항마로 설 수 있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또 현재와 같이 구여권이 사분오열된 상황에서는 김근태 전 의장 말대로 "한나라당이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 전 의장의 이번 불출마 선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근태 전 의장이 엄청난 정치적 실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내용적으로는 확률적으로 획득 가능성이 희박한 '대권'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확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유력 대선주자가 '대권'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김근태 전 의장은 획득 가능성이 희박한 정치적 실리보다 더 확실하고 '쎈' 것을 얻게 됐다. 김근태 전 의장은 정치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향후 '정치적 명분'은 확실히 챙기게 됐다.
김 전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금 국민들의 마음은 한마디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가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렸으니, 합당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정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며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가 그 짐을 지겠다. 김근태가 십자가를 지고 무덤 속으로 걸어가겠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과 과거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져야할 실정 책임 모두를 자신이 '대선 불출마'로 지겠다는 것.
김근태, "버릴 것이 있다면 더 버리겠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정에 대해 책임을 지고 불출마를 선언한 이상 누구도 김근태 전 의장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그간 열린우리당은 탈당파 대 당사수파, 대통합 대 소통합, 친노 대 반노 등의 전선으로 나뉘어 쟁투를 벌여왔다. 특히 그간 김근태 전 의장은 당해체와 대통합을 주장하며 노무현 대통령과도 대립각을 세워왔고, 이에 노 대통령은 김 전 의장에게 탈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 달 7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브리핑에 게재한 글에서 김근태, 정동영 두 전직 의장을 겨냥해 “당이 어려우면 당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원에 대한 도리이자 국민에 대한 도리”라며 “(열린우리당이)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노력할 가치도 없다 싶으면 그냥 당을 나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노 대통령은 이 글에서 “정말 당을 해체해야 할 정도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깨끗하게 정치를 그만두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까지 했다.
노 대통령의 독설이 적중했는지, 김근태 전 의장은 대선 불출마와 탈당을 선언했다. 또 김 전 의장은 "버릴 것이 있다면 더 버리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년 총선 역시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2007년 대선이 대한민국의 10년 미래를 가르는 분수령이기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명분 챙긴 김근태, "노 대통령, 미래는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에게 맡겨라"
당 해체를 반대해온 노 대통령의 김 전 의장에 대한 견제는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모양새다. 표면적으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배수진을 친 이상 김 전 의장은 이제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열린우리당 해체와 대통합작업에 나설 수 있게 된 셈이다.
당장 김 전 의장은 이날 대선 불출마 선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을 향해 "안정적인 국정 마무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며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현재 대선 구도에 노 대통령이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또 김 전 의장은 통합한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 의원들을 향해서도 "소통합을 반대하고, 국민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대통합의 징검다리가 되어 달라"고 결단을 촉구하며, 소통합파를 압박하고 나섰다.
김 전 의장의 불출마로 지지부진한 구여권의 통합작업의 물꼬가 트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그가 통합의 '불쏘시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상 지금보다는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특히 그간 당 사수 입장을 견지해 온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내 친노세력의 입지도 타격을 입게 됐다.
과거 김 전 의장을 공격하며 "정치는 잔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렇게 정치해오지 않았다. 정치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말해 온 노 대통령이 흔한 말로 '꿀릴 게 없어진'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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