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봉기, 정부를 추락시키다”

키르기스 민중저항에 관한 보고

[편집자주] 폭도들의 난동인가 혹은 신자유주의 그리고 족벌경영체제의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거센 봉기였던가. 최근 키르기스스탄에서의 민중 투쟁과 정권 인수에 관한 독일 ‘사회주의적 대안’(Sozialistische Alternative)의 보고를 통해 당시 현장을 재구성해보자. 이 보고는 롭 요네스(Rob Jones), 아누아 쿠르마노우(Aynur Kurmanow) 그리고 첸야 오토(Zhenya Otto)와 한 증언자에 의해 공동으로 구성됐다.



"혁명적 봉기, 정부를 추락시키다”
키르기스 민중저항에 관한 보고


"민족신뢰"의 정부는 그들이 권력을 넘겨받았다고 설명했다

  시위자들이 비스케크에 있는 의회를 점령하고 환호하고 있다. [출처: 타즈(http://www.taz.de/uploads/hp_taz_img/full/kiurgistan.jpg)]
주의할만한 24시간 동안 키르기스의 북쪽 탈라스에서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저항이 터져 나왔다. 수도, 비스케크는 곧, 정부가 저격부대와 철갑의 병력으로 질식시키고자 했던 군중봉기에 의해 요동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이 바뀌고 봉기를 지원하기 시작할 때까지 군중은 앞으로 전진했고, 정부청사를 공격했으며 경찰에 대항해 무장했다.

저녁, 정부는 퇴진했고 대통령 바키예프는 이에 따라 시 외곽 미공군기지 마나스에 있던 그의 정부제트기를 타고 비스케크로부터 탈출했다. 풍문에 의하면, 그의 목표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가까운, 남쪽에 있는 그의 고향 오쉬 또는 심지어 프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는 성장하는 반대자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는, 중앙아시아 그리고 독립국가연합에서의 다른 모든 독재적 지배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영국신문 파이낸셜 타임지는 망명하여 살고 있는 야당지도자 에딜 바이날로우(Edil Baisalow)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가 본 것은 고전적인 민중봉기이다. 그것은 혁명이고 그들은 피를 흘렸다.” 그는 혼란에 대한 책임을 정부의 독재적인 행동에 있다고 지목했고 “그것은 사람들이 남비에 뚜껑을 너무 꽉 닫으면 발생한다 – 그것은 폭발한다”고 덧붙였다(파이낸셜 타임지 4월 8일자).

대통령 바키예프는 단지 5년 전 „튤립혁명“에 의해 정권을 수립했다. 그때 친자본주의적인 야당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에 거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키르기스 군중과 함께 당시 대통령 아카예프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중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당시의 결과를 CWI(노동자 인터네셔널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거리의 힘‘은 충분했던 반면, 대안적인 정부를 성사시키기 필요한, 지역을 움켜쥐고 있는 부패와 빈곤을 중단시키는 데는 충분치 않았다. 키르기스에서, 그의 특별 하수인들이 다시 권력을 쥐는 동안, 오로지 아카예프만이 도망가야 했다.

이러한 예언은 실제로 나타났고 바키예프는 곧 그의 동맹과 함께 파괴됐다. 오늘날의 야당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은 원래 아카예프의 정부에 있었다.

군중들의 가장 큰 고통중의 하나는 바키예프 아래 계속 커졌던 부패와 족벌주의였다. 이 국가는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큰 부패가 일어나는 20개의 국가 중의 하나이다. 바키예프는 „그의 뿌리와 그들의 양육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언급하며 사과했다. 그의 형제는 이를 테면 안전경찰의 대표이고 그의 아들은 얼마 전 자국 산업생산의 40%를 차지하는 ‚키르기잘텐‘ 광산의 주식의 다수를 인수했던 중앙 발전, 투자 그리고 혁신관청의 리더이다. 심지어 대통령직이 상속직으로 바뀌면서 헌법 또한 수정됐다.

바키예프가 권력을 쥐면서 키그기스스탄은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타지스키스탄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1991년 이후 억압적으로 정권을 쥔 신자유주의 정권은 단지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기 위해 너무 약했고 다툼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바키예프의 승리 이후 국가기구는 계속해서 중앙화됐고 대통령은 보다 많은 독재적 권력을 인수했다.

심각한 빈곤

이것은 군중의 심각한 빈곤의 배경 하에서 발생했다. 정부가 올해 전기값의 두 배 인상 그리고 다섯 배에서 열 배 가량의 난방비용의 인상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월소득은 항상 30- 50 미 달러에 달했다. 일반 빈곤은 실제적인 저항을 추동한 힘이었다.

저항은 북쪽의 도시 탈라스에서 시작했다. 봉건적인 전통을 위해 대통령은 매년 한번 그의 정치와 용무를 설명하기 위해 국민에 대한 공식회견인 „쿠룰타야“를 열었다. 이러한 „민중과의 대화“는 전국의 도시 중앙의 장소들에 군중집회의 형식을 생겨나게 했다. 올해 바키예프는 가격인상의 불가피성을 설명해야 했다. 공개적인 압력에 의해 그는 더욱이 의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권력위치로부터 그의 형제들을 사임시켜야 한다고 강요 받았다.

야당은 자신의 쿠룰타야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회담 동안 그들은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가격인상은 파기되어야 하고, 전기회사는 다시 국유화되어야 하며 대통령의 친척은 그들의 자리로부터 내려와야 한다“. 모든 정치적인 수감자의 석방도 요구됐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러한 요구에 모든 민주주의적 권리들을 위한 전투의 불가피성을 덧붙인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조합 설립의 권리, 집회의 권리,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자유로운 언론 그리고 노동자, 청소년, 학생, 소상인 그리고 국민들이 포함된 모든 인간의 실제적으로 대표되는 집회의 소집.
바키예프는 탄압으로 최후통첩에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계속되는 집회 참가를 방해하기 위해, 4월 6일 야당 ‚아타 메켄(Ata Meken)(조국)‘의 지도자 볼로트 세르니야초우(Bolot Sherniyazow)는 구속됐다. 이 도시에서 봉기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수천의 저항자들은 경찰의 주요거점에 뭉쳤고 볼로트 세르니야초우의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빠르게 손을 들었고 그들은 단지 심문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중의 의사는 커져갔고, 그들은 그 지역정부의 청사로 움직였으며 „민중의 편에 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의 말 때문에 지사는 그의 입장에 대해 시위자들을 확신시킬 수 없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공격했고, 지역청사의 건물을 점거했으며 다른 지역대표가 선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키예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탄압 아래 모든 것을 두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도시의 전화연결을 차단했고, 핸드폰연결 또한 끊겼으며 더욱이 인터넷도 그러했다. 전국에 걸쳐 저항이 최루탄과 고무총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됐다고 보고됐다.

그러나 우리의 통신원은 다른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는 시위자들은 계속해서 경찰과 전투를 벌였으며 몇몇 정부청사가 점거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시의회 건물은 몇몇 경찰서처럼 방화됐다. 그들은 공항을 점거했다. 4월 6일 저녁 시는 화염병을 가진 청소년들에 의해 방어됐던 바리케이트에 의해 마비됐다. 한편, 우리의 통신원은 당직경찰이 얼마 전 OSZE(유럽 안보 협력 기구)에서의 안전과 공동작업 조직에 의해 돈으로 새롭게 무장됐다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OSZE 덕분에“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결과가 일어나는 동안 정부는 대안적인 집회가 4월 7일 전국에 걸쳐 불법적으로 열렸다고 알려졌다. „통일된 민중운동“(가장 중요한 야당들의 통일체)의 지도적인 구성원들이 체포됐다 - 7명의 핵심인물과 수 십 명의 활동가들이 비스케크에서 격리됐다. [...]

하지만 탈라스에서 야당의 저항을 억압한 시도는 봉기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로 빠르게 확산됐다. 나르얀, 이식쿨 그리고 바트켄에서의 공격되고 점화된 정부청사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경찰과 시위자의 충돌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들 저항은 빠르게 수도인 비스케크로 퍼져나갔다. 야당지도자들의 참여와 함께 저항은 자율적이었고, 그들은 주거비와 식용품비의 상승 그리고 핵심산업의 사유화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보였다. 이 목소리는 정부의 억압적인 조치에 의해 가열됐고 이에 의해 인터넷사이트의 폐쇄와 저항의 금지 그리고 지도적인 야당구성원의 체포가 벌어졌다.


비스케크 증인들로부터 기록은 어떻게 이들 결과가 발전됐는지를 가리킨다:

4월 7일 15시 11분

수천의 시위자들이 의회건물에 모여들었다. 이들 군중은 경찰이 그들을 머물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사람들은 쇠사슬을 끊었고 철갑 차량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시위자들의 주요 요구는 대통령의 퇴진이었다.

모든 야당지도자들이 구금됐다 – 국가쿠데타를 조직한다는 비난 하에. 저항은 실제적으로 자발적이었다. 지금 그들은 언론인들을 체포하려 시도한다. 스탄 TV대표인 키릴 스테판육(Kirill Stepanyuk)은 방금 연행됐다. 사람들은 정부가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선언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처음에는 아카예프, 지금은 바키예프 – 너희를 보아라, 아무런 일자리가 없다. 지금 그들은 우리를 쏘려 한다. 그들은 피를 위한 피로 지불하고자 한다“고 한 시위자가 외쳤다.

4월 7일 16시 10분

비스케크에서 실제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당직경찰을 무장해제시켰고 경찰들의 방패, 곤봉 그리고 가스총을 접수했다. 경찰들은 사격을 거부했고 떠났으며 손을 높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지금 몇몇 경찰차를 인수하는 것을 보았다. 두 개의 어두운 녹색의 트럭 – 그 중의 하나에 유탄발사기가 있다. 거기 손에 최루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핸드폰 연결이 차단됐다. 탱크가 거리를 지나가고 그것은 무거운 대포를 나르고 있다. 우리는 시위자들이 다른 지역에서 왔다고 들었다.

4월 7일 17시 3분

전쟁이다! 백색의 집(정부 주요거처) 지붕으로부터 저격수들이 많은 양의 실탄으로 총을 쏘았다. 나는 4명의 사상자를 보았고, 그들의 머리가 총에 저격됐다. ‚사회주의적 저항 카자흐스탄‘은 모든 노동조합, 청소년그룹, 정당 그리고 운동들에 대통령의 짐승 같은 행동을 반대하는 저항에 시위할 것을 절박하게 호소했다. 우리는 방금 키릴 스테판육(스탄 TV)이 재정경찰에 의해 해고됐다고 들었다.

4월 7일 17시 23분

시위대들은 저격수들을 발견했다. 그는 백색 집의 지붕 위에 있었고 시위자들의 뒤에서 총을 쏘았다. 그는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지금 순간은 평온. 정부는 어떠한 위기상황도 선언할 수 없었다 – 의회는 결정능력이 없다. 야당은 여전히 감옥에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직했다. 시위자들은 TV건물로 몰아쳤다 – 그들은 방송시설을 파괴했고 다시 돌아갔다.

인권활동가들로부터 우리는 키르기스에서의 상황(17시 9분경)이 다음과 같았다고 들었다: 이시쿨스키(Issykulskii)-지역의 지사가 퇴진됐다. 방송센터가 점거됐다 – TV-방송시설이 파괴됐고 즉흥적인 라디오전파가 준비됐다. 지역정부의 건물들이 탈라스, 나르얀, 이시쿨 그리고 박텐(4-6 개 지역)에서 점거됐다. 시정부 건물이 5개 지역에서, 경찰주요거처는 3개 지역에서 인수됐다.

비스케크에서 시위자들의 수는 증가했다. 많은 희생자들이 있다. 서방 언론에 따르면 100명 이상 저격수에 의해 사망했다. 정부는 그들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군중을 단지 보다 성나게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키예프는 사람들에 대한 사격을 중단하라!

고속도로 코흐코어-비스케크가 차단됐다. 탈라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경찰우두머리는 그의 명령, 무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심하게 구타당했다.

4월 7일 19시 57분

경찰은 백색의 집에서 사격했다. 많은 부상자와 희생자가 있다. 시위자는 백색의 집으로 움직였다. 가까운 곳에서 많은 이들이 검사사무소를 공격했다.

4월 7일 21시 20분

상황이 통제밖에 있다. 바키예프 정권은 다시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바키예프의 가족이 대피했고 공군무기보호지점인 마나스에 있는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는 소문이 있다(비스케크의 공항에 있는 미군기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위해 미국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인권그룹에 따르면 시의 병원에 적어도 56명의 희생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격에도 불구하고 시위자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들은 무장하고자 시도하고 경찰로부터 방패와 곤봉을 넘겨받았고 몇몇은 당직경찰로부터 무기를 가졌다. 이 순간 백색 집은 포위됐고 검사건물과 안전경찰 그리고 두 개의 정부편향적인 방송사가 점거됐다.

군인들과 철갑으로 무장한 차량들이 대도시의 거리에 있다. 정부가 피로서 봉기를 질식시키려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 경찰과 군부대들은 포기했고, 시위자의 측에 합류했으며 그들은 유니폼을 벗었고 시위자들 사이에 섞였다. 러시아의 방송사에서 시위자들이 범죄자들이고 소수인종박해가 있었다고 주장됐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소유한 국가재산의 거대 부분이 넘겨졌다는데 항의한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사회적 저항의 많은 요소를 가진다 – 시위자의 주장은 국유화 그리고 경제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했다. 독재자 바키예프가 더 공격할지라도 그의 정권은 더 이상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다면 이웃국가로 확산될 수 있다.

4월 8일 1시 47분

우리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저항이 승리적이었다고 한다. 군중은 오늘 밤 안전경찰의 주요 거처와 가까운 감옥이 공격됐다. 이전에 구금된 여당의 지도자들이 석방됐다. 흰색 집은 무너졌고 “민중신뢰”의 정부는 구성됐다. 이전 의회대변인 오무르베크 테케바예프(Omurbek Tekebaew)는 방송에서 권력은 완전히 민중의 손에 놓였다고 설명했다. 13명의 핵심적 수행자가 선출됐고 „사회민주주의자“ 로자 오툼바예바(Rosa Otumbajewa)가 대표로서 이끈다.

테케바예프는 국가의 지도를 위한 완전한 책임을 거리의 질서를 다시 형성할 수 있기 위해 그들이 넘겨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의 소식에 따르면 몇몇 도시에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와 바키예프 가족의 집들이 약탈당했고 방어부대가 상황을 통제하고자 시도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추가적으로 그들의 국경선을 닫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아마도 중국정부 또한 그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에 있는 CWI의 논평(2010년 4월 7일)

이러한 결과는 실제적인 경제위기와 2005년 튤립혁명의 결과에 대한 민중의 절망의 결과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새로운 정부가 지금 전기비와 난방비 상승을 철회했으며 금광산업과 전략적 산업의 재국유화를 알렸다. 이러한 조건 아래 군중저항은 그들의 권리를 관철시킬 가장 좋은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사회적 프로그램과 조직 없다면, 그러한 혁명적 결과는 계속적으로 군중의 혁명적 결과가 자본가계급 그들의 고유한 이익을 위해 이용될 „무늬만인 혁명“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이미 지금 새로운 정부는 2005년에 사용됐던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단지 바키예프 없는 같은 파당이 권력으로 오고 있다. 그들은 민중의 분노를 파괴하고 화풀이를 하기 위해 지난 양일을 사용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에 의한 대통령 선출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민주적으로 조직된 계획경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 단지 이러한 길에서 경제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억압에 반대하고 의사와 조직의 자유에 찬성하며 가격상승과 실업에 반대하고, 집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지지하는 그리고 은행, 금광산업과 민주적 통제와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경제의 핵심 분야의 국유화를 위한 정책이라는 분명한 정책과 전략을 가진 좌파적 대중정당의 설립을 위해 호소한다. 이를 위해 봉급생활자와 가난한 이들의 „쿠룰타야“(Kurultaya)를 조직하고 노동자계급의 모든 층을 대표하는 노동자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원문] http://www.sozialismus.info/?sid=3637
[번역] 정은희(객원기자=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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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 키르기스스탄 , 키르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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