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손에 들고 도착한 멕시코 남부의 오아하까는 이주의 과정을 겪은 사람과 이방인이자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달리 존재한다. 500년전 이곳으로 이주를 한 사람은 스페인인들이고, 그들의 이주로 인해 이방인이자 문화적 소수자로 남은 사람은 기원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리고 있던 원주민이다.
▲ 오아하까 시 전경. 보이는 큰 건물이 산토도밍고 성당 전면이다. 성당 왼편의 붉은 돔 지붕들이 성당과 연결된 수도원 건물로 현재 오아하까 문화 박물관이다. |
오아하까 주의 주도인 오아하까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다. 여행객이 방문할만한 곳은 걸어서 30분 안쪽에 모두 몰려있고, 외곽지역도 고만고만해 보인다. 세계 2위 도시인구를 자랑하는 멕시코시티에 살다보니 공간크기에 대한 실감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오아하까 시를 중심으로 두어 시간 거리에 가볼만한 마을이 여럿이다. 이번 여행은 오아하까 주변마을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 마을에서는 스페인어만큼이나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 언어(2005년 기준으로 멕시코 전체인구의 6%가 넘는 6백만 명이 스페인어 이외의 토착어를 사용하는데, 오아하까는 주 인구의 30% 이상이 토착어를 사용한다)가 흔히 들려올 테고,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오는 장날의 북적임도 기대된다. 수백 년 전에도 그네들은 경작한 작물이나 천과 옹기 따위를 메고 이런 장날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제 유적지로 불리는 그들이 살던 도시의 흔적도 먼지 냄새처럼 아련하지만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 점심준비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 오아하까시 근처 오코틀란 마을에는 그곳 출신의 화가 로돌포 모랄레스가 살았던 집에 소박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건물 2층은 전시실로 사용되지만 1층은 여전히 생활공간이다. 정지된 사물만 늘어서있는 박물관 아래층에서 스프 끓이는 냄새가 나는 사랑스러운 장소다. |
멕시코에는 ‘인디헤나’라 불리는 원주민 문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스페인 정복 이후 300년간 원주민을 인디오라 불렀으나, 19세기 들어서면서 경멸적 어조와 인종 차별 대신 원주민을 멕시코 ‘시민’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인디헤나라는 새로운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어로는 원주민 또는 선주민이라 옮겨지나, 한국어로 원주민이라 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과거인’이라는 의미로 뒤틀려지는 기분이다. 과거의 나를 포함하여 아직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원시인과 원주민의 혼합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12월 24일 밤 광장에서는 성탄절을 기념하는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동네마다 성당을 중심으로 행렬을 준비해 광장으로 모여든다. |
오아하까 지역에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사포테카와 믹스테카를 비롯한 문화(사포테카의 중심 도시였던 몬테알반은 최고 삼만 오천 명의 인구를 거느렸으나, 이후 쇠락하다가 14세기 들어서 믹스테카 문화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사포테카와 믹스테카는 각각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립된 문화를 뜻하며, 주변지역의 여러 문화권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달하였다)가 번성했고, 1532년 스페인인들이 오아하까라 이름 붙이고,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이후에도 그들의 언어와 문화, 정치체제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계승되었다. 여행책자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오아하까의 명소는 이 짧은 3줄의 문장 어디쯤에서 비롯된다.
▲ 몬테알반 |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13세기까지 번창한 사포테카 문화의 중심이었던 도시, 몬테알반(Monte Alban). 사포테카어는 현재 멕시코 각지의 7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이지만, 천 년전 사포테카인들의 도시에 붙여진 ‘몬테알반’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사용하던 것이 아니다. 사포테카어로는 ‘다니바’라 불렸고, 신성한 언덕이라는 뜻이란다. 몬테알반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6세기 몬테알반이라는 성을 가진 스페인 군인의 소유였기 때문이라는 설, 로마의 알바노 언덕(Monte Albano)에서 유래했다는 설, 철이 되면 하얀 꽃으로 가득 덮이기에 ‘하얀 산’(Monte Blanco)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다. 더 이상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고즈넉한 유적지는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 천년의 시간과 천년이란 시간의 무게를 무색케 만드는 눈부신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문득 내가 유적지를 보러 온 것인지 바다가 아니라 하늘임을 알려주려는 구름을 보러온 것인지 아득해진다.
▲ 몬테알반 |
남아있는 건축물만으로는 천 년전 하루해가 뜰 때 누군가의 발자국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스름이 내릴 무렵 어디로 이어졌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신을 향한 의례를 행하는 곳이었거나 고위신분층의 거주지였다지만, 높다란 기단만 남아있는 곳이 많아 상상 속에서 지붕을 씌어보기도 하고 건물을 올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천 년 전을 상상하는데 필요한 것은 건축학적 지식이 아니라 저 광장을 가득 메웠을 신성을 향한 열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 년에 걸쳐 노동력만으로 조금씩 넓어지고 위로 솟아갔을 건축물들을 상상해보자. 옛 사포테카인들에게 몬테알반 같은 언덕과 산, 동굴 등의 장소는 신성과 인간 공동체가 만나는 곳이었고, 그 장소들을 품고 있는 ‘땅’은 경작을 하고, 다스려야 하는 ‘영토’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성한 ‘공간’이었다.
▲ 몬테알반 |
500년 전 다른 신을 경배하는 자들이 이 땅에 도착했고, 그들은 신성의 공간을 행정단위로 영토화시켰다. 그 영토화는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근대화 이전 정치적 행정단위와 가톨릭 교구단위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식민화 과정에서는 가톨릭 선교가 정치적 지배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오아하까 시 안내지도에 소개된 성당은 십 여 개가 넘는다. 그 가운데 며칠 동안 부리나케 맴돌았던 산토 도밍고 성당과 수도원은 블럭 하나를 통째로 차지할 만큼 규모가 크다. 오아하까 문화박물관, 오아하까 자생식물을 옮겨놓은 정원, 도서관 등이 각기 입구만 달리 한 채 성당에 붙어있는 수도원 건물을 채우고 있다.
▲ 산토도밍고 성당. 1570년경 건축을 시작하여 40년 후 성당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여백에 대한 공포라고 압축적으로 설명되듯이 수많은 성상과 반복적인 무늬로 내부는 빈틈없이 빼곡히 차있고 금빛으로 빛난다. 알려고 달려들면 그 빼곡한 이미지들은 차고 넘치는 의미의 과잉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성상 하나는 어느 성인인지를 넘어 그 성인의 일대기까지 꼬리를 물고 의미를 확장할 것이고, 반복되는 무늬는 몇 번의 반복이고 왜 그만큼의 횟수가 반복되는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백을 남기지 못하는 강박과 그 강박을 지배하는 의미화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 무지한 한 사람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순간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는 곳이다.
▲ 산토 도밍고 성당 내부 |
황금빛 광채에 잠시 현혹된 후, 오아하까 자생식물 수백 종을 모아놓은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대부분 선인장이다. 선인장이란 식물은 절대 나와 가까워질 것 같지 않다. 강한 햇볕 아래 오랜 세월 견뎌온 억센 기운이 나에겐 좀 버겁다.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가다보면, 인간과 얽히고 설켜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길다.
▲ 오아하까 자생식물원. 식물원의 스페인어 이름을 직역하자면 ‘오아하까 역사 민속-식물원’으로 오아하까인들과 이곳의 자생식물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문화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살아오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취지를 나타낸다. |
마지막으로 가이드가 안내해준 곳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 내부와 대조적으로 밋밋할 정도로 소박한 조형물이 있는 곳이다. 정원의 식물들이 자리를 잡고 방문객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면 정원의 입구가 될 곳이라 했다. 붉은 빛의 커다란 사각형상 전면에 기하학적 기호가 새겨져 있고, 성냥갑 같은 조형물 위로 물이 흐른다.
▲ 미틀라의 피-프란시스코 톨레도 작 |
‘미틀라의 피’라는 프란시스코 톨레도의 작품이다. 미틀라는 몬테알반이 몰락할 즈음인 기원후 750년 경 새로운 정치 종교의 중심으로 떠올라 스페인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주요 도시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지배로 미틀라는 몰락하고, 원주민들은 작물과 가축 등을 세금으로 내야했고, 정해진 일수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들의 노동력을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코치니야’라 불리는 선인장에 서식하는 작은 곤충을 보살피고 채집하는 일이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 식민시대 선인장에서 코치니야를 채집하는 모습의 삽화 2) 코치니야를 집어내는 모습. 3) 염료를 추출하는 암컷 코치니야 삽화. 4) 손바닥의 하얀색 코치니야와 코치니야에서 쏟아져나오는 붉은 색. |
코치니야는 붉은 색 염료의 원료로, 지금도 케첩이나 캄파리라는 이탈리아 알콜 음료의 붉은 색을 내는데 사용된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코치니야는 금 못지않게 값비싼 것이었고, 당연히 수많은 원주민들이 코치니야 사육과 채집에 동원되었다. ‘미틀라의 피’를 흐르는 붉은빛은 코치니야를 사용한 것이고, 전면의 기호는 미틀라 유적지에 새겨진 반복무늬에서 따온 것이다. 산토도밍고 성당 건축의 휘황찬란함은 원주민이 바친 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조형물이라 했다.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산토도밍고 성당의 차고 넘치는 욕망은 기억했으되, 이 검소한 조형물에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곡차곡 접힌 의미를 껴안고 있기는 거대한 건축물이나 아담한 조형물이나 매한가지겠으나, 여행객이란 가장 일차적인 감각과 인상에 좌우되기 마련인가보다.
▲ 여행 중 마주친 시선들 |
어느 블로그에서인가 멕시코의 유적지를 방문한 후 남긴 글에서 ‘고대 멕시코인’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스페인 지배 이전 현재 멕시코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아챘지만, 잠시 ‘고대’와 ‘멕시코인’이라는 조합에 당황스러웠다. 대략 몇 세기를 가리키는 것인지조차 모호하기 그지없는 ‘고대’라는 단어와 2010년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멕시코’라는 근대국가를 한 단어로 몰아넣자 삐걱거림이 신경을 긁어댄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한국 국적의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독일군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파울 첼란이 쓴 독일어 시를 인용하며, 어떤 언어를 특정한 국가와 일대일로 묶어버리는 폭력성에 대해 말한다. 또 그는 베를린에서 사망한 윤이상을 이야기한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서독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윤이상은 끝내 한국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가 요구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북한과의 절연을 분명히 하라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오아하까 문화 박물관 전시물. 오아하까 주 안에 여러 언어권이 분포되어 있는 모습. |
근대국가는 언어와 영토를 독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근대국가의 경계에 따라 구획지우는 쉬운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사포테카니, 미스테카니, 듣도 보도 못한 아득한 고대인(?!)을 궁금해하기 보다는, 구글 지도 검색에 분명한 선으로 나타나는 멕시코라는 분류에 쉽게 기댄다. 우리는 국경을 가로지르거나 한 국가 내부의 영토를 여러 문화권으로 조각내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난 2천 년간 서경 102° 북위 23°에 걸쳐있는 2백만km²의 땅에서 역사의 부침을 살아낸 인간의 흔적을 ‘멕시코’라는 틀로 말해버리기에는 잘려나가는 여분이 너무 많다. 몬테알반에서 신을 경외시하며 공놀이 의례를 했던 사포테카 청년과 코치니야를 거둬가는 스페인 관리의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는 사포테카 여인과 토요일마다 장에 가려고 버스에 오르는 사포테카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멕시코 국적의 아주머니는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비슷할까.
▲ 오아하까 시에서 2시간 떨어진 곳의 이에르베 엘 아구아. 깊은 산 속 석화된 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다. |
그리고 이제 오아하까 주 (현재 멕시코에서 세 번째로 빈곤한 주인 오아하까 주 농민들 대다수가 1994년 나프타 협정 체결 이후 경제적으로 급속히 몰락했다.) 지역 주민 다수는 먹고살기 위해 입국서류 없이 미국으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또르디야와 햄버거를 함께 먹을 것이고, 영어와 스페인어와 사포테카어를 사용할지도 모르고, 오아하까를 방문한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 수놓인 면블라우스 대신 영어로고가 찍힌 티셔츠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사포테카어, 스페인어, 영어 가운데 무엇을 모어로 삼아 성장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아하까(Oaxaca) 주의 주도인 오아하까 데 후아레스(Oaxaca de Juarez)로 흔히 오아하까로 줄여 부른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느라 멕시코에서 5년째 책상물림으로 살고 있다. 가끔 다리가 저리면 꼼지락꼼지락 여행을 꿈꾼다. NGA의 한국친구들과 멕시코친구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 여행을 다니면서 생긴 궁금증을 풀어준 해결사들이다. 여행 가기 전에 들춰봤다가 오아하까에 도착해서야 이해하게 된 것들도 있다.
Marcello Carmagnani, El regreso de los dioses. El proceso de reconstitución de la identidad étnica en Oaxaca, México, FCE, 1988.
Revista arqueología mexicana, Recorridos por Oaxaca Valles Centrales. Edición Especial Núm. 24, Junio de 2007.
Revista arqueología mexicana, Culturas prehispánicas de México. Edición Especial Núm. 34, Abril de 2010.
María Justina Sarabia Viejo, La Grana y el Añil, Sevilla, Escuela de Estudios Hispano-Americanos,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