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크레인에서 이소선 어머님께 띄우는 추모의 편지

"어머님의 영정을 모시고 85호 크레인 밑에 와 있습니다."

어머님!

천리길 넘어 부산 영도섬 한진중공업 공장내 85호 크레인 중간층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비보를 접하고도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85호 크레인 윗층에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은 하루종일 트위터 등 모든 일을 놓고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고, 저와 3명의 사수대 동지들은 가슴으로만 애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진중공업 자본과 자본편향주의인 이명박 정권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85호 크레인에서는 어머님이 안치되어 있는 서울대병원 영안실도, 장례식에도 갈 수가 없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들 전태일 열사 정신을 새롭게 되새기고 어머님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거울삼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을 승리하여 보답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어머님 영정 앞에 추모의 편지를 바칩니다.

미천한 글이지만 억압과 착취가 없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에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님!

저는 경남 남해 섬마을에서 4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어머님 뱃속에서 새로운 바깥세상을 보는 날 어버지는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강제 징집되어 얻은 병으로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아이를 다들 유복자라고들 하더군요.

당시 섬마을 집안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좀 산다는 집은 친일을 해서 재산을 헌납 받았든지 아니면 종가집 종손 집안 정도였습니다.

저의 집안 또한 형편이 너무 어려워 형님 두 분과 누나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밖에 나올 수 없었고, 내 위의 형님은 중학교를 졸업했고, 저는 막내라 어머님이 어장막에서 식모일을 해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막내에게는 특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모유를 5살까지 먹을 수 있었고, 그래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젖을 뗐는지조차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아버지를 일찍 잃고 혼자서 가정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일을 나갈 때는 방에 아이를 혼자 두고 문고리를 잠그고 나가야 했습니다.

들판 길을 걷는 동안 어머니의 귓전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 어머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는 방을 헤매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님!

그렇게 어렵게 살았던 아이도 세월이 가면서 집 근처 수산고등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말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내성적 성격이라 반 학생들 앞에서 제대로 말조차 못하며 살았습니다.

수산학교를 나오면 대부분 배를 탑니다. 그래도 공부를 제법 했는지 저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훈련소에 시험을 치고 입소할 수 있었습니다.

6개월 과정인 훈려소를 수료하면 자동으로 한진중공업 정식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비정규직이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82년 8월 1일 대 한진중공업 조선소 기관실 공사부에 배속되어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님은 막내 아들이 부산에서 잘 나가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면 정말 기뻐했습니다. 어머님은 막내와 함께 살겠다며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 영도 삼복도로 주변에 전셋방을 얻어 이사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처음 직장생활을 하는 촌놈의 눈에는 조선소의 모든 것들이 새롭기만 했습니다. 큰 도크 바닥 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아주 작아 보엿고, 5만톤이 넘는 유조선, 벌크선, 가스 운반선, 컨테이너선 등을 보는 것은 웅장함 그 자체였고, 1만5000 마력이 넘는 선박 엔진과 프로펠라의 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게 보였습니다.

조선소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군대를 갔고, 군 생활을 마치고 1986년 11월 경 회사에 복귀하는 날 정문 앞에는 해고자 세 분이 출근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 분의 동지 중에 한 분은 여성 동지였습니다. 바로 85호 크레인에서 244일이 넘게 고공투쟁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는 제대하고 복귀한 저를 포함해 몇몇 동료들을 중대본부로 데려가 교육을 시켰습니다. "김진숙은 빨갱이다. 만약 해고자들에게 동요하게 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진중공업에서도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습니다. 87년 7월 25일. 우리는 이 투쟁을 7.25 투쟁이라고 부릅니다.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은 부산 태광산업을 시작으로 한진중공업 7.25 투쟁, 그리고 거제에서 구로까지 투쟁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어머님!

당시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지는 정규 교육을 받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랐던 저는 7.25 투쟁시 백골단이 최류탄을 난사하며 공장을 침탈하여 동료들을 무참히 짓밟고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세상도 있구나, 경찰이 평범한 시민을 짓밟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26세의 젊은 저의 사고를 뒤흔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새롭게 세상 보는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91년 박창수 집행부 때 저는 교육선전부장을 했습니다. 한진중공업 자본과 국가기관 안기부는 박창수 집행부를 강성 노조로 규정하고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안기부 직원을 현장에 침투시켜 노조간부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노협 탈퇴 공작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박창수 위원장은 대우조선 노동조합 파업 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로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대기업연대회의 간부 수련회가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렸는데 참석한 노조간부 6명 전원을 연행해 위원장급 8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간부들은 법정 구금시간 72시간을 넘기고 석방했습니다.

한진중공업에서는 박창수 위원장과 김주익 문체부장 그리고 교선부장인 제가 함께 연행되었다가 박창수 위원장은 구속되고 저희들은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박차수 위원장은 서울 구치소에서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한진중공업 전체 조합원은 ‘박창수 위원장 옥중 살인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63일간 파업을 전개 했습니다. 결국 진상 규명은 이루지 못하고 박창수 위원장을 노동해방 열사 전국 노동자장으로 양산 솥발산 공원 묘지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이 되고 해고가 되었습니다. 그 후 2003년 김주익 열사투쟁으로 13년 만에 복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부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제가 복직되는 것을 보고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마음 고생만 시켰던 막내는 어머님 장례식 때 수많은 조문객으로 마지막 효도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님!

저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머님의 아들 전태일 열사 평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수십 배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태일 평전을 읽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착함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바로 전태일 열사였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은 박창수 열사 장례 투쟁에서 처음 뵐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활동을 하면서 어머님 곁에 자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현대자동차 성과금 분배 파업투쟁, 한진중공업 LNG 선상 파업투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과 열사 투쟁에 어머님은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어머님!

유가협 부모임들과 함께 생활했던 한울삶, 열사들의 영정을 뒤로 한 채 그곳을 지키고 있던 어머님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합니다.

87년 6월 민주화 운동, 7,8,9 노동자 대투쟁, 과거 군사독재 시절 군대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철거현장에서, 공장에서 죽음의 진상조차 모르게 죽어간 아들, 딸, 남편의 한을 풀고자 89년 서울역에서 부산역에서 대공장 정문에서 집회장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판을 설치하고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기구 건설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시던 유가협 부모님과 어머님의 모습. 97년 기독교 회관 농성을 시작으로 국회 앞 천막농성 422일을 진행했던 부모님들의 모습. 70줄이 넘어선 부모님들이 국회 앞 노상에서 그 추운 겨울 침낭에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던 모습.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국회의원 뱃지 단 놈들의 멱살을 잡고 하소연하시던 부모님들의 모습. 우리들의 역사가 영원히 기억을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어머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함께 투쟁을 했던 기억을 어찌 잊겠습니까?

부모님들의 투쟁은 국가 차원의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원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동안 고초를 받았던 동지들에게 작은 혜택도 부여해 주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노동자, 농민, 학생, 도시빈민들의 투쟁현장에서 항상 강조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날 한시에 일손을 놓고 총파업을 한다면 정권도 바꿀 수 있고, 세상도 바꿀 수 있다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투쟁을 보지도 못하고 우리들 곁을 떠나가시는군요. 이제 모든 것을 산자들에게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더 나은 세상으로 가십시오.

살아생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가서 김진숙 지도위원과 동지들을 보고 손도 흔들어 주고 힘도 되어 주고 싶었는데 끝내 그것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 누우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어머님의 영정을 모시고 이곳 85호 크레인 밑에 와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김진숙 지도위원과 4명의 동지가 있습니다.

어머님!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죽겠다고 마음먹고 투쟁에 돌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투쟁에 임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극으로 몰아가며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와 가족들의 죽음이요, 용산참사 현장이요, 2003년 김주익, 곽재규 열사가 있었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이었습니다.

어머님!

이제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함께하고 있는 동지들이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정마을 투쟁을 엄호하고, 쌍용자동차 동지들과 가족들을 엄호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 투쟁을 엄호하고, 여기 244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85호 크레인 김진숙 지도위원과 4명의 사수대 동지를 엄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님!

그동안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 이제 내려 놓으십시오. 우리 산자들이 나누어 지고 투쟁하겠습니다.

소외 받고 고통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 정리해고가 없는 세상, 폭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마음 편히 가십시오.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부족했던 저의 짧은 삶과 전태일 열사 평전을 접하고 느낀 감정, 치열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어머님의 삶을 목격했던 기억을 글로 정리해 올리게 되어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나 자신이 반성하는 기회가 되어 어머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중간층에서 정리해고투쟁위원회 공동대표 박성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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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희

    님여 참으로 오래만이네요? 제가 잘못생각하엿는지 당시 님 구속중이 부산구치소 아니신지요?아니가 아니면 죄송합니다 만약에 맏다면 그당시 일반재소자 로서 저랑 님동료들과 함께 참 친햇는데 함게 밥도 먹었는데? 우얏든 님의 글 잘읽어 보았습니다 님의 건투를 바람니다 함께 힘냅시다 부산영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