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라는 이가 있다. 잘 알다시피 그는 개혁자유주의정치세력 가운데 일부인 국민참여당을 이끌면서 ‘진보대통합논의’ 과정에 개입하여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을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이후 ‘통합진보당사태’를 계기로 그 당을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이라는, 어찌 보면 극우정당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이름의 당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궤적은 애초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 당권파를 핵심으로 하는 NL그룹과 심상정, 노회찬 등 진보신당 통합파의 일부가 우경화하면서 국민참여당과 권력배분에 합의하여 만든 정당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파기된 상황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그 궤적을 환기시키는 것은 바로 그 과정이 제도 내 진보정당의 ‘파산과정’이었다는 점, 따라서 그 과정은 ‘배타적 지지’라는 시대착오적 고리로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대중운동, 특히 ‘민주노총’의 권위 붕괴와 맞물려 있었으며 바로 이런 흐름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유시민 씨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것은 그를 윤리적으로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데, 애초 진보좌파의 헤게모니 빈곤에서 비롯된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진보좌파정치의 덕목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정당정치의 약한 고리를 잘 파고들어 균열을 낸 그의 마키아벨리적 능력은 오히려 칭찬받을 만하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와 같은 이가 있기에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지금 대선국면이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의 굿판으로 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런 그가 이번에는 노동자대통령 후보인 김소연의 대선출마에 대해 “금속노조나 다른 노조들이 하는 일이 아닌 진보정치권이나 노동계의 소위 정파라는 내부 모임들 중 일부에서 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민주노총 전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른바 진보진영의 인사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그들과 달리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하였는지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이 발언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부터 그가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의 결정을 자신의 정치적 판단 및 행보의 준거로 삼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발언이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더 이상 고통 받는 노동자대중의 벗이 아니라 최소한 개혁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그 조직들이 자초한 것으로 그것은 지난 2010 지방선거 당시 진보정당의 후보보다 유시민 씨 등 자유주의정치세력을 지지하는데 몰두한 것만 환기시켜보아도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 그 연장 속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전직, 현직 간부들이 자기통치성의 제고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대중들을 뒤로 하고 이른바 ‘진보정치의 파산’을 핑계 삼아 줄줄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품에 안기고 있는 것 또한 이를 확인해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파산의 책임으로부터 자신들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싶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유시민 씨에게 오히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정치인인 그가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지금 어떠한 조직으로 전락했는지 공식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 진정 살아 있는 노동운동, 노동정치의 씨앗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실을 이 세상에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기우에서이지만 그렇다고 민주노총의 구성원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김소연 후보나 지금 이 순간에도 풍찬노숙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민주노총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상황이 민주노총의 대중적 권위가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그를 대체할 새로운 대중적 조직이 출현하지 않고 있는 현실의 반영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교착상태는 아마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의 발언을 접하면서 고마움과 함께 연민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실 필자는 정치인 혹은 저술가로서의 그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해보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화두를 던져주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 즐거움을 준 기억은 있는데, 학생들에게 카야노 도시히토의 <국가란 무엇인가-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읽어오라고 하였더니 한 학생이 그가 쓴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와 모두 웃었던 기억이 그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한 가지 가시지 않았던 그에 대한 궁금증은 필자가 보기에 그와 이념, 정치관, 그리고 정책 등에서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어 ‘저토록 미움을 사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김소연 후보에 대한 그의 발언을 보면서 ‘아! 저래서 미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사람들의 그것이 비난이 아니라 비판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혁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를 이끌고 자신의 왼편 옆자리로 이동한 심상정, 노회찬 등 과거 진보신당 통합파의 일부와 ‘진보정의당’을 만든 이가 김소연 후보의 출마에 대해 진보정치권, 노동계 일부 정파의 기획으로 운운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이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른바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고 ‘진보정의당’의 대선후보들만큼이나 말 그대로 일부 정파의 산물인 경우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과정이야말로 자신들이 기획하고 자신들이 후보가 되는 기가 막힌 것 아니었던가. 아마도 그렇기에 김소연 후보로 상징되는 현장 노동자대중을 특정 정파의 단순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니겠는가. 대중이 직접 나서는 정치(운동)을 혐오하는, 그야말로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그의 엘리트주의가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치세력의 정치적 현존을 겸허히 돌아보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오랜 궁금증이 풀린 것에 대한 시원함보다는 오히려 인간적 연민이 더 밀려 왔다. 이른바 학계의 말미에서 정치학을 배우는 사람으로 그래도 그에게 어떤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무감’이 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정치의 ‘전근대성’, ‘비합리성’을 비판하면서 ‘정상적인 정치와 민주주의’를 역설한 것이 그의 주요한 정치적 레퍼토리이고 아마 일반 대중들 또한 그것에 공감하여 그를 지지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터인데, 그의 이번 발언이야말로 자신의 레퍼토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혹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자기 몫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몫을 갖고자 싸우는 와중에서 고통 받고 죽임당하는, 배제된 이들의 정치적 자유와 활동을 무시하는 발언이야말로, 혹시 자신을 ‘제도권 안의 정치적 소수자’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가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점을, 그 순간 그 자신이 누차 비판하며 넘어서고자 한 구시대정치의 전형적인 표본이 되는 것이기에 차후에는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누군가 고언을 한다고 해서 교정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라면 애초에 그런 발언이 나왔겠는가. 이른바 ‘정치초년생’도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회한 이미지를 풍기는 정치인으로부터 말이다. 최소한 자신이 하는 말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그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아니면 급진적이든 그것을 보는 입장에서는 항상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가 언제나 인지하고 자기화할 수 있게 될까. ‘개혁자유주의자’인 그에 대한 연민이 더욱 강해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