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45년의 8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격변을 고려하면, 방향 감각을 찾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돌아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지난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열린 ‘1945년의 의미를 기념하는 회의’에서 나는 토론 마무리 발표자로 초청받아 “세계경제의 미래”에 대해 15분간 발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이처럼 밋밋한 주제를 어떻게 하면 생동감 있게 만들 수 있을까?
나로서는 이런 ‘밋밋함’ 자체가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지금 이 순간, “미래”를 묻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는 어떤 순간인가? 그리고 그 미래 속에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는 ‘세계경제’라는 것이 여전히 존재할까?
이 어지럼증을 다잡기 위해, 먼저 미래에 ‘비교적 예측 가능한’ 몇 가지 흐름을 짚어보자. 다음은 그러한 상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망의 짧은 목록이다.
▪유럽의 경제적 비중은 앞으로도 계속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제도적 기반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세계에서 과도하게 큰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달러의 광범위한 사용은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력에 엄청난 영향을 부여하고 있으며, 기술·인공지능 붐에서 입증되듯, 미국의 혁신 동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나 법치의 약화가 있어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반드시 합리적 법치와 예측 가능한 거버넌스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막스 베버식 착각(Weberian conceit)에 가깝다. 브렉시트, 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 1기, 트럼프 2기를 겪은 지금, 우리는 ‘자유주의적 정상성의 위반이 곧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세계 생산의 중심은 계속 아시아로 이동할 것이다. 일부는 이미 ‘중국의 정점(peak China)’이 지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돈을 걸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수십 년의 진짜 ‘물음표’는 아프리카 대륙이다. 이미 예정된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감안할 때, 이제는 아프리카를 세계사의 주변부로 밀어내는 사고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아프리카 내 주요 경제권들 가운데 충분한 수가 ‘작동 가능한 성장모델’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미래는 절대적 빈곤이 사하라 이남의 젊고 급증하는 인구에 집중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정치, 인권 개념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예측 가능한 질문이지만, 아직 답은 없다.
▪지난 10년간, 경제정책 전반에는 뚜렷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자리 잡았다. 이는 때로는 포퓰리즘, 때로는 전략적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1990년대 이후의 지배적 정책 논리로부터 놀라운 전환이다. 분명, ‘세계화’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종언을 맞았다. 그러나 탈동조화(decoupling), 탈위험화(derisking) 등 온갖 담론에도 지금까지 세계경제의 주요 흐름에 미친 실질적 영향은 제한적이다. 33조 달러 규모의 거대한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 안에는 ‘파괴’만큼이나 ‘복잡성’이 존재하며, 이 복잡성은 그간의 단순한 ‘세계화 서사’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았다.
▪거시경제정책, 즉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작동하며, 정책 결정자들은 이를 과거보다 훨씬 능숙하게 운용하고 있다. 2008년, 2020년의 위기에서도 치명적 붕괴를 피한 것이 그 증거다. 따라서 1929~1933년과 같은 대공황 규모의 붕괴가 다시 올 가능성은 낮다.
이러한 요인들은 향후 10년 이상 세계를 규정할 가능성이 높은 흐름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극도로 ‘보수적인’ 사고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20세기적 권력-지식 체계를 21세기 위에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매우 복잡한 분야지만, 우리가 흔히 ‘세계경제’를 논할 때 사용하는 경제학의 틀은 여전히 국제경제학(international economics)이다. 이 학문은 이름 그대로 inter-national, 즉 국가 간 경제학으로, 세계경제를 ‘상당히 독립적인 여러 국민경제들이 무역과 자본 흐름을 통해 연결된 체계’로 상정한다. 이때 그 흐름을 측정하는 기본 지표는 국제수지(balance of payments)다.
이런 관점을 나는 ‘레고식 세계경제관(lego vision of the world economy)’이라 부르고 싶다. 몇몇 큰 ‘국민경제 블록’들이 작은 블록들과 붙어서 전체를 구성하고, 각 블록은 고유한 이름(미국 경제, 중국 경제, 벨기에 경제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독일 보고서와 인도네시아 보고서가 사실상 같은 분석 틀과 지표를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 dirkb86
IMF, OECD, 세계은행(World Bank) 같은 기관들이 수행하는 표준적 보고서와 전망의 대부분은, 세계경제를 크고 작은 국민경제들의 집합으로 보는 ‘레고 블록’식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훗날 세계화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었음에도, 그 제도들은 원래 전후 유엔 체제의 경제·금융적 대응물로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2025년에 “레고 모델”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밋밋한 주제를 역사적으로 더 깊이 있게 전환시키는 한 방법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2025년의 시점에서, 여전히 레고 블록식 세계경제 모델로 미래를 그릴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20세기 중반의 범주들에서 벗어난 세계경제는 어떤 모습으로 상상될 수 있을까?
‘포스트-포스트워(post-post-war)’ 세계경제, 즉 전후 질서 이후의 세계경제란 무엇일까?
“국민국가 블록”으로 짜인 세계관은 역사적 예외였다 사실, 세계경제를 ‘중견국가 단위의 블록들’로 구성된 체계로 상상하는 20세기 중반의 레고식 시각은 역사적으로 유일한 접근이 아니었다.
근세 초기의 역사가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세계주의를 말해준다. 예를 들어, 인도양을 따라 연결된 해상 교역망(seaways), 혹은 실크로드처럼 얇지만 긴 교역의 실타래를 중심으로 한 세계상(世界像) 말이다.
“세계경제”라는 용어(Weltwirtschaft)는 19세기 후반 독일어권 경제학자들의 논쟁 속에서 처음 등장했다. 한 학파는 지도를 이용해 ‘세계경제 유기체’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려 했고, 다른 학파는 제국들 간의 경쟁이 만들어낸 제도와 구조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고의 토양 속에서 ‘세계정치(Weltpolitik)’와 ‘세계대전(Weltkrieg)’이라는 개념도 함께 태어났다. 반면, 더 경직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런 실질적 개념을 거부하고, 상품 가격의 시세망(price quotations)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통해 세계경제를 이해하려 했다.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구상된 세계경제는, 그 이전 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단히 경계 지어진 국민경제들(hardened national economies)’로 구성된 체계였다. 전후 질서를 이루는 이 레고 블록들은 세계대전과 그 이전의 대공황·전간기 위기 속에서 ‘압착되어 형성된’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세계를 벗어난 게 아닌가? 이쯤에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세계를 떠난 것이 아니었던가? 이미 세계화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 아니었던가? 국민국가의 경제 경계는 녹아내린 것이 아니던가?”
사실상 1980년대에 이르러, 무역과 자본시장 자유화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면서 1940년대식 국민경제 중심의 세계관은 심대한 압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국가 단위의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현실에 맞춰 조정되었고, 이는 최근 장 피자니-페리(Jean Pisani-Ferry)가 다시 상기시킨 바 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다국적기업(multinationals)의 역할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 같은 기관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는 국제경제학이 현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주류 경제학의 한복판에서도 “세계경제란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재고가 시작되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신현송(Hyun Song Shin)은 일련의 고전적 논문들에서, 세계경제를 더 이상 ‘국민경제 블록들의 모음’으로 보는 대신, “상호 연결된 민간 대차대조표의 그물망”으로 다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21세기의 세계경제는 이제 ‘국가 간 무역’이 아니라 ‘자본 흐름과 금융 네트워크의 상호 얽힘’으로 이해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신현송의 이미지는 2008년에 폭발한 은행 부문을 해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더 넓게 확장되어 세계화 전체와 그로부터 뻗어 나온 공급망들을 묘사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전 세계 무역의 상당 부분이 국경을 넘어 흐를지라도, 실제로 그것은 대기업들 내부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현송의 관점은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이며, 나는 그에게로 거듭해서 돌아가게 된다.
돌이켜보면 분명한 것은, 거대하게 연결된 사유화된 세계경제라는 비전이 단지 정교한 통계적 묘사로서가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적극적 모델로서 2008년에 위기의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신현송과 다른 이들이 했던 것처럼 그것을 명확히 보기 위해서라도 그 위기를 겪을 필요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서, “세계경제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에 답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방식은, 그 질문을 이 네트워크적 관점의 미래에 대한 물음으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계경제가 민간 대차대조표들로 얽힌 거미줄 같은 구조로서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그것이 세계 생산의 실제 기반으로서, 혹은 역사적 발전의 타당한 목적론적 귀결로서, 아니면 세계가 지향해야 할 규범적 모델로서 존속할 것이라고 보는가?
21세기 첫 25년 동안 중국 경제의 성공이 낳은 역설적 결과 중 하나는, 그것이 대차대조표 네트워크로 구성된 세계경제의 비전을 되살린 것이 아니라, 1950년대식 국민경제 모델의 재가열판을 부활시켰다는 점이다.
▪중국의 외환 계정 규제는 유럽과 미국이 1970~1980년대에야 비로소 벗어났던, 1940~50년대 ‘전후(postwar)’형 통제 체제의 잔존물이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는 환율 통제, 환율 목표제, 외환보유고, 자본 유출입 같은 문제들이 중심적 관심사가 된다.
▪중국의 성장을 이끈 주된 동력은 수출이나 세계화가 아니라 국내 경제 통합이었다.
▪중국은 점점 더 의식적으로 강력한 국가 산업정책의 전형, 즉 ‘중국제조 2015-2025(Made in China 2015–2025)’의 대표적 실천자로 자신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서구 자본주의의 상호연결된 대차대조표와 공급망 속의 하나의 노드로 통합되는 중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시진핑 체제의 민족주의적 정치통제와 국가경제정책의 복귀, 그리고 2020년에 ‘이중순환’ 전략을 공식 채택한 일은 중국의 국민경제를 재통합시켰다. 끊임없는 반부패 운동은 이 국가경제 이념에 대한 충성을 중국 기업 엘리트들의 생존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서방 경제와의 갈등 심화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경제정책 담론은 ‘중국 충격(China shock)’에 대응하면서 다시 국민경제 모델의 부활로 회귀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특히 1940년대, 무기대여법(Lend-Lease), 그리고 ‘민주주의의 병기창’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노골적으로 소환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세계경제의 미래는 이제 20세기 중반으로의 회귀로 상상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이든 행정부가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좌절과 실망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레고 블록 위를 맨발로 밟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것들은 작지만 단단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 이유는 1950년대 후반 독일의 바이엘(Bayer AG)이 만들어낸 레고 플라스틱의 독특한 화학적 조성과, 블록 내부의 정교한 설계 구조 덕분이다.
출처: Brightontoymuseum
20세기 중반에 익숙했던 단단하고 견고한 형태의 국민경제를 다시 만들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재료와 내부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둘 중 어느 것도 21세기의 서방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볼커 쇼크(Volcker shock)와 1990년대 세계화 추진 사이의 시기에 유럽과 미국의 정치경제 체제는 완전히 속이 비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0세기 중반의 경제정책이 지녔던 효율성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 시기의 정치경제를 규정했던 계급세력 간 균형은 사라진 시대다.
2008년과 2020년에 있었던 거대한 거시경제 정책 실험들조차 조합주의적(corporatist) 기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린뉴딜’(Green New Deal),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그리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의 목표는 사실상 한때 거시경제 정책을 움직였던 계급세력 간 균형을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관세 정책의 이해집단 정치는 과거 국민경제가 형성되던 기초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25년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세 정치의 광경은 기이하다. 그것은 이해집단의 압력도, 구조적 논의도 거의 없이, 대통령의 즉흥적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관세 정치다.
그렇다면, 미래가 복원된 국민경제의 복고적 유토피아도 아니고, 1990~2000년대의 사유화된 대차대조표 네트워크형 세계경제도 아니라면, 앞으로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내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것은 ‘세계화 이후의 세계성(globality beyond globalization)’, 즉 불균등하고 해체된 형태의 글로벌리즘(patchy, disintegrated globalism)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세계를 섬들의 집합도 아니고, 네트워크의 그물망도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 세계는, 크고 작은 블록들, 실처럼 얽힌 네트워크의 가닥들, 그리고 수억 명이 뿌리 뽑힌 채로 살아가는,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존재들 — 사람들, 소상공인들, 소자본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혼합체일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붙잡고 고민해 온 질문이다. 지난 겨울 방학 동안, 수술에서 회복하는 중에 나는 수년 전 썼던 두 편의 글을 다시 꺼내 되살렸다.
질문은 이것이다. 불균등 결합 발전의 형태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금융화” 같은 축약적 표현(환유, synecdoche)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세계경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즉, 형태가 덜하고, 구조가 덜한 무언가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상상해보지 않겠는가 — 단단한 벽돌들로 가지런히 조립된 구조물도, 서로 맞물린 대차대조표들의 그물망도 아닌, 덩어리진 죽(potage) 혹은 면과 만두가 뒤섞인 국물, 그런 무정형의 혼합물로서 세계경제의 미래 형태를 말이다.
모든 것은 국경 없는 자본(footloose money)과 대체로 이동 가능한 노동력과 자본이 이루는 끈적한 유체 속에 부유하고 있다. 가끔은 씹을 만한 영양 덩어리들, 즉 기술 체계의 핵심 조각들, 유망한 브랜드나 제도적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그 사이로는 얽히고설킨 면발들, 즉 네트워크의 실타래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고부가가치의 고기 덩어리—이를테면 석유국가(petrostate)나 뉴욕 같은 세계도시—를 발견할 수도 있다. 혹은 완탕 같은 존재도 있다.
즉, 바깥과 안이 구분되고 내부 구조를 지닌 개체, 다른 국물 속의 재료들과는 달리 독립된 형태를 가진 무엇이다.
세계경제를 만두와 면이 떠 있는 국물로 상상하는 것이 다소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미지는 레고 블록 같은 국민경제의 복귀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세계화(hyperglobalism)의 재현보다 훨씬 그럴듯한 묘사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미지를 계속 밀고 나가 보자. 그 ‘수프’를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그 전체 혼합물을 담을 용기(container)를 전제한다면, 이미 답을 누설하고 있는 셈이다. 그릇이 있다면 — 이를테면 명확한 경계를 가진 환경적 외피라면 — 그것이 결국 세계경제와 그 미래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릇이 없는 수프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위태로움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현실주의적 징후일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수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쏟아지거나, 매끈한 작업대 위에 흩뿌려지는 수프를 상상해보라. 그것은 점성(黏性) 덕분에 잠시 형태를 유지하다가, 곧 가장자리를 따라 흘러내린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떨어지는 것은 언제나 묽은 국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출처] Chartbook 413 The future of the world economy beyond globalization - or, thinking with soup.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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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