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액트48호-이슈] ‘검열’ 혹은 ‘협의’

어느덧 12년이다. 국가권력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광주인권영화제의 험난한 길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초기에는 영화제 상영자체가 하나의 투쟁과정이었다. 정부의 잣대에 걸리는 ‘이적표현물’을 상영한단 이유로 가시밭길을 걷기도 했다. 광주인권영화제는 그간 인권교육을 위한 하나의 시도로써 ‘영화??를 선택했으며, ‘인권’을 주제로 하는 ‘대안영화’의 장으로서 기능을 해 왔다. 또한 지역의 대안영상물과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격려하는 역할도 함께 해왔다.

영화제란 형식을 통해 지역사회에 서서히 인권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광주인권영화제는 세월의 두께만큼 작품들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특히 광주에서 만든 작품들을 발굴하여 보여주는 세션은 더욱 의미가 깊다. ‘광주’라는 공간에서 부비고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아낸 작품들은 ‘특별한 울림’을 안겨준다. ‘박제된 오월’과 ‘평화와 인권’의 도시라는 이미지로 포장된 광주라는 공간에서 어쩜 인권영화제는 친숙한 듯 낯선 존재로 인식되리라.

마음이 불온해지는 시절, 광주인권영화제를 준비해온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좀 해야겠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영화제였다. 지금껏 광주인권영화제가 이렇게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영화’보다 영화 외적인 걸로 더 주목받게 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혹자는 이제 와서 왜 긁어 부스럼이냐고 딴죽을 걸 수도 있을게다.

12회 광주인권영화제가 얼마 전 막을 내렸다. 광주시민의 대부분은 모르고 있을 작고 소박한 광주인권영화제가 올해는 유난히 들썩거렸다.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의(이하 미디어센터) ‘사전검열’ 때문이다.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치열함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올해 광주인권영화제는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간단치 않은 여러 문제들이 얽혀 있었지만, 스스로 ‘타협’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껏 지켜왔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임에도 미약하게 대처했다. 물론 인권영화제 조직위에서는 영화제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조건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권영화제의 정신을 훼손했던 조직위의 불찰이 가려지진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한 이유들은 변명에 불과하다. 인권영화제의 정신을 오롯이 지켜내지 못한 이번 영화제는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이다. 사실 이번 영화제는 준비하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광주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라는 그릇으로 새로운 담금질을 시작했지만 인권영화제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지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이었다. 그런 기우를 안고 출발한 영화제가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다니. 기우가 현실로 외화되는 순간, 잠시 길을 잃고 헤매게 된 걸까. 그간 광주인권영화제는 조촐하고 소박한 차림새였지만 언제나 힘이 났고, 함께 하는 손길들도 그만큼 더 애틋했다. 물론 올해도 구석구석 많은 이들의 손길이 묻어났고, 조금씩 늘어가는 관객들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올해 광주인권영화제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들춰보고자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서럽고 쓰라린 목소리를 통해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성찰해 보고자 했다. 한데 시작부터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장소를 제공했던 미디어센터가 ‘비정규직 필살기’란 슬로건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필살기’란 표현이 그렇게 강한 표현인지 왜 ‘붉은색’이 들어가면 이념적으로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이 하 수상한 ‘그때 그 시절’도 아니고, 좌익용공(?) 세력이 판치는 시절도 아니고 말이다. 한번 박힌 ‘붉은색’에 대한 편견은 쉬 사라지지 않고 유령처럼 배회하며 발목을 잡는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문제는 이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차별의 문제를 날것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비정규직 필살기’는 그런 비정규직의 절박한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한 슬로건이다.


영화제 기간인 지난 12월 8일 인권?미디어단체들이 미디어센터의 ‘사전검열’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디어센터의 답변은 여러 차례 기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전히 ‘사전협의’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답변에는 ‘검열’이라는 표현이 누락돼 있다.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사전협의’가 아니라 ‘사후협의’가 정확한 표현이다. 처음부터 플래카드에 대한 재수정을 요구했던 것도, 포스터의 강렬한(아마도 이념적인) 이미지 때문에 붙이지 못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미디어센터였다. 이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자 명백한 ‘사전검열’ 행위이다. 미디어센터가 처음부터 홍보물 부착을 용인했었더라면 ‘사전검열’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전검열 과정은 생략한 채 조직위와의 협의를 거쳤다는 식으로만 얘기 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행위다. 협의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문제가 봉합되는 건 아니다. 인권·미디어단체에서는 ‘사후협의’가 아니라 ‘사전검열’부분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인데, 미디어센터에서는 여전히 헛다리만 짚고 있다. 알면서도 일부러 본질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인 걸까? ‘의도’하니 생각나는 얘기 한 토막. 얼마 전 미디어센터와 관계된 이가 개인적인 소견이라며 얘기하길, “혹시 무슨 저의가 있는 거 아니냐, 영화제도 성공적으로(?) 치르던 상황이었고, 잘 끝났는데 왜 자꾸 문제를 만드는지 그 저의가 궁금하다”고 하였다. 미디어센터를 말아먹기 위한 수작?! 미디어센터가 올곧게 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어린 비판과 조언들을 하고 있는데 ‘저의’라니 씁쓸할 따름이다. 비약이겠지만, 이거 원 조심스러워서 쓴 소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싶다. 개인의 의견이지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게 혹 미디어센터에 몸담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레 걱정이 된다. ‘사전검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미디어센터에 몸담고 있는 누구도 용기 있게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었다. ‘호남인권영상공모전’과 ‘청소년인권영상제’를 공동주최하는 단위로서 미디어센터 스탭들이 영화제 기간에 보여준 모습들도 못내 아쉬웠다. 자체 일정들 때문에 바쁘다는 건 십분 이해하지만 영화제 기간 내내 관심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미디어활동가를 발굴해나갈 교육기관으로서 ‘독립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 건 지나친 기대였을까.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미디어 교육이란 게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키워주는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프로그램들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길에 ‘인권영화제’ 같은 행사들이 좋은 교육의 장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참, 의도하지 않게 공개된 지면에 사적인(?) 얘기를 언급한 건 그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미디어센터는 주류미디어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사회적 소통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기관이다. 이 사회의 약소자들이 자유롭게 발언하고 또한 그것을 진정성 있게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시청자미디어센터의 광주설립은 정말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시청자미디어센터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권리 찾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의 권리’를 찾는데 기여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어센터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센터장의 ‘의미 있는’ 인사말이다. 이렇게 멋진 인사말을 뒤로하고 왜 미디어센터의 행보는 갈짓자 걸음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을 수는 있다. 하지만 출발부터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자들을 길들이는 방식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나 써먹던 수법이다. 미디어센터가 이번 일을 교훈삼아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공공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공론의 장을?형성해가길 바란다. 인권영화제를 치루며 ‘표현의 자유’를 실현한다는 게 여전히 녹록치 않음을 절감한다. 이번 일을 교훈삼아 광주인권영화제는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 해 한 해 치르기가 버거울 정도로 상황이 어렵고, 매번 장소선정의 어려움에 봉착하고 관객들의 수도 고만고만하고, 차츰 장애, 여성, 노동, 환경 등 부문별 영화제도 생겨나는 추세인지라, 어찌 보면 인권영화제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되어가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영화제는 계속 되어야 한다. 절박한 삶에서 길어 올린 날것의 영상을 통해 이 사회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무감한 삶에 조그만 변화라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인권영화제의 힘이고 지속되어야 할 이유이다.

매년 인권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지만 우리의 인권현실은 별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권력의 정책은 약소자들의 삶을 더욱 짓누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억압과 저항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상에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한,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한,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을 향한 인권영화제의 치열한 시선은 계속될 것이다. □

[참고자료]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의 광주인권영화제에 대한 검열 규탄 공동 성명(12월 8일)
: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의 광주인권영화제에 대한 시대착오적 검열을 강력히 규탄한다
http://www.mediact.org/web/media/play_view.php?code=Media&mode=View&bbid=MEDIA_PLAY&type=&
page=1&part=&nums=161&numC=&grp=&sfl=&stx=

광주인권영화제 검열에 대한 시청자미디어센터(광주)의 사과문
http://www.mediact.org/web/media/play_view.php?code=Media&mode=Modify&bbid=MEDIA_PLAY&type=
&part=&page=&nums=167&grp=&sfl=&stx=